넥슨 시절 트리 오브 세이비어 공식 홈페이지 GOS 매거진에 올라왔던 4인의 마스터 이야기입니다. 이벤트 책 아이템과 4인의 마스터 컬렉션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얻는 건지는 알 수 없습니다.
4인의 마스터는 커세어 마스터 하이레이번, 슈바르츠라이터 마스터 워시스 크리크, 몽크 마스터 올파스 그림, 도펠죌트너 마스터 그에라입니다.
쓰여있는 날짜는 GOS 매거진에 올라왔던 시간입니다. 내용이랑 상관은 없어요.
본문 내용 엄청 깁니다. 스압주의!
글: 허안
삽화: 마기
목차
하이레이번의 비공식 항해일지1: 대해적 하이레이번
2017.05.18 오전 10:21:50
하이레이번의 비공식 항해일지1
대해적 블라디슬로바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의 발자국엔 그가 쓰러뜨린 적의 피로 찰랑거렸으며, 마족도 고개를 숙이고 뒷걸음 칠 정도로 사악하고 잔혹하기 그지 없었다. 그 무자비한 블라디슬로바스 앞에 채 솜털도 벗겨지지 않은 하이레이번이 서 있었다. 철썩이는 파도, 흔들리는 조각배..머리 위를 떠도는 갈매기들마저 숨죽여 바라보고 있었다. 이 싸움의 승리자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대해적의 이름을 지키느냐, 빼앗느냐 그것뿐. 하이레이번은 자신의 커틀러를 빼어 들고 눈 앞에 있는 블라디슬로바스에게 질풍같은 공격을 시작했다. 가슴팍을 향해서 찌르기 한 번, 양 옆구리를 향해서 두 번. 그러나 블라디슬로바스에겐 너무 빤히 보이는 공격이었다. 블라디슬로바스는 하이레이번의 커틀러스를 맞받아 친 뒤, 발로 하이레이번의 명치를 걷어 차 쓰러뜨렸다. 그리곤 마치 어린 해적을 가르치듯이.. 칼자루 끝으로 하이레이번을 마구 내려쳤다. 간신히 빠져나와서 다시 자세를 고쳐 잡은 하이레이번. 하지만 이미 하이레이번은 지쳐 있었고 전세는 블라디슬로바스에게로 기운 것 같았다.
하이레이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아마 항복한다면, 잔인하지만 유능한 해적인 블라디슬로바스는그를 부하로 삼을지도 몰랐다. 끝낼 수 있었으면서도 한 수 늦춰준 것을 보면 그럴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하이레이번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으며 상대가 볼 수 없는 그 마음속에서 블라디슬로바스에게 교활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리곤 그에게 달려들어 고집스럽게도 같은 공격을 되풀이했다. 그에게 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블라디슬로바스는 이제 젊은 하이레이번을 가지고 노는 게 지겨워졌다. 이번엔 칼자루가 아닌 칼 끝을 하이레이번의 핏줄 선 목에 꽂으리라. 그러나 하이레이번은 갑자기 몸을 틀더니,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은 정확히 블라디슬로바스의 미간에 박혔고, 그의 커다란 몸뚱이는 천천히 하이레이번 쪽으로 넘어졌다. '철썩!' 그 작은 조각배는 블라디슬로바스와 하이레이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뒤집히고 말았다. 파도는 계속 조각배의 옆구리를 때렸고, 숨 죽여 구경하던 갈매기들도 꺼억꺼억 울어댔다. 그리고 바다 위엔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대해적의 이름은 파도에 휩쓸려갔다.
먼 바다가 조각배와 두 명의 대해적을 삼킨 장소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거대한 하나의 배가 있었다. 그 위에서 두 무리의 남자들이 나뉘어서 각기 배의 이물과 고물을 중심으로 중간을 비우고 진영을 형성하고 있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곁눈으로 가끔 서로를 보면서도 대부분의 시선은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 방향은 그들 양측 무리의 두목이 조각배 하나에 같이 타고 떠난 방향이었다.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싸운 양측의 전투는 결국 단 한 척의 배만을 남겼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적으로 싸운 남자들은 이제는 전투를 중지한 채, 무언의 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한 쪽은 원래 이 배의 주인들이었고, 다른 쪽은 전투의 와중에 자신들의 배가 침몰당하고 적선에 올라 백병전을 벌이던 남자들이었다.
그러나 합의된 사항이 지켜진다면, 두 무리의 남자들은 오늘 이후 누가 원래 이 배의 사람들이었느냐에 상관없이 모두 이 배의 선원들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누가 이 배의 선장이 될지 누가 그들의 두목이 될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블라디슬로바스나 하이레이번 둘 중 살아서 돌아오는 쪽이 그 역할을 맡도록 그들 모두가 동의하였다. 블라디슬로바스를 거역할 해적은 없었으며, 젊은 하이레이번이 그를 죽였다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루한 무언의 대치는 고물쪽을 차지한 블라디슬로바스의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 입을 열면서 처음 깨졌다. 블라디슬로바스의 2항사로 시독SeaDog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남자였다. 가슴팍에 큰 개가 그려진 문신을 지닌 큰 덩치를 약간 세우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만약 다음 번 해가 질 때까지도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닻을 올리고 이 해역을 떠나는 편이 낫지 않겠나?”
이물쪽을 차지하고 있던 하이레이번의 생존자 무리 가운데 가장 선임자인 3항사가 반걸음 앞으로나섰다. 여자의 다리통 굵기의 팔뚝을 지녔고, 그 팔뚝을 타고 오르는 바닷뱀의 문신을 한 오세아니드Oceanid라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을 지닌 남자의 입에서 시독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나왔다. “베르니케 섬 근처에 갈 때까지 싸우지 않겠다고 유라테 여신을 두고 맹세한다면 그렇게 하지.”
시독이 주저 없이 그 말을 받았다. “베르니케 섬에 도달하기 전에 이 배위에서 싸움을 하는 자들은 영원히 키보토스의 바닥짐이 되어 굴러다닐 것을 유라테 여신께 맹세한다.”
시독이 이렇게 말하자 오세아니드 역시 같은 말을 반복했고, 곧 동시에 이물과 고물에서 양측 모두 같은 말을 외쳤다.
모두의 맹세의 외침이 끝나자 시독이 하늘을 살짝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만약 그전에라도 폭풍이 분다면 그렇게 했으면 좋겠군. 뭐 그럴 날씨로는 보이지 않지만..”
오세아니드 역시 오래 묵은 뱃사람이라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아직은 폭풍의 조짐은 느낄 수 없었으나 시독의 말에 동의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차피 양측의 남은 인원으로는 폭풍을 감당하면서 배를 움직이는 일은 불가능하다. 뭐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유라테 여신께서 좋은 날씨를 주셔도 현재 양측의 인원을 다 달려들어 합심해야 겨우 베르니케 섬까지 항해할 수 있을 테니 그 때까지는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지.”
그랬다. 디슬로바스와 하이레이번의 부하들이자 왕국의 바다를 누비는 해적들인 그들이 약속을 매우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 각자 자기 두목들의 결투 결과를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겉만 보면 그들의 두 선장은 왕국의 바다를 지배하는 대해적의 이름과 마지막 남은 이 배의 선장 자리와 한 무리는 적의 부하들이었던, 두 무리의 해적들의 두목 자리를 걸고 결투를 떠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한 가지 점에만 합의한다면 그들의 두 무리 부하들은 지금이라도 서로의 혹은 상대방의 선장을 버려두고 닻을 올리고 배를 움직여 떠나버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런 행위야 말로 그들의 그간 행태와 그들의 성격에 잘 들어맞는 일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난 이틀간의 해상전이 너무 치열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제 새로 선장을 정하는 일로 다투고 싶지 않았다. 아니 다투고 싶었지만, 그것이 그들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블라디슬로바스와 하이레이번 둘 중 하나가 돌아온다면, 그가 누구든 그들 모두의 선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다면 일단은 이 해역을 떠나겠지만, 결국 누가 선장이 되느냐를 놓고 다시 싸움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틀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남은 인원이 다시 반이나 반의 반으로 줄어도 배를 운용하는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육지나 항구에 가까운 곳까지 예컨대 베르니케 섬까지 간 다음의 일이지만 말이다.
그 정도까지 인원이 줄면, 누가 두목이 되든 과거의 위세를 회복하는 일은 무척 어려울 것이고, 결국은 다른 해적들의 밑으로 들어가거나 당할 수도 있었다.
한 척의 배와 그것을 양측이 합쳐야 겨우 운용하여 위험한 이 해역을 벗어날 정도의 인원만 남을 때까지, 이틀간의 전투를 벌인 뒤에야 깨닫게 된 사실 때문에 양측 두목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이 대결은 수장들간의 결투로 승부를 결정짓는다는 합의에 도달하였고, 이런 상황 가운데 두 무리는 어느 쪽이든 승자가 돌아오기를 정해진 시간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시독과 오세아니드로 대표되는 양측은 다시 침묵에 잠겼다. 말끝에 혹은 불편한 시선 끝에 다시 언제든 싸움이 발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한 상대가 아닌 멀리 수평선이나 뱃전에 시선을 두었다. 어느 시선 끝에 ‘너 이 자식 눈빛이 건방져.’ 라는 한 마디면 만사가 망쳐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양측의 현재 선임이 시독과 오세아니드라는 그래도 머리를 조금 쓰는 성향의 해적이라 그 점에서는 다행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누군가 뱃전에 걸린 줄사다리를 이용해 올라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정상적인 배라면 항상 있어야 할 망꾼 자리 돛대 위에는 사정상 서로가 서로를 견제하느라 아무도 배치할 수 없었기에 누가 올라오는지 보려면 몸을 내밀어 아래를 내려다 볼 수밖에 없었으나 양측 중 아무도 뱃전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선장들이 타고 나간 조각배가 노를 저어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으니 아마도 지금 올라 오고 있는 사람은 헤엄을 쳐서 돌아온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먼 거리라고 생각되었지만, 다른 누군가가 뜬금없이 헤엄쳐 배에 접근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해역이었다.
갑판을 메운 사람들이 올라오는 자의 기척에 집중하고 있었고, 결국 그 사람의 손이 뱃전을 굳게 붙잡았다. 그러나 뱃전에 올라온 손은 누구에게도 낯익지 않았다. 피와 바닷물 그리고 햇볕의 세례를 받으며 먼 거리의 바다를 몸으로 헤엄쳤다면 그럴 수 있었다. 누구도 그 손을 돕기 위해 접근할 수 없었다. 무언의 분위기가 그것을 막고 있었다. 행여라도 자기들의 원래 선장이 아니기에 밀어버리거나 해치려고 접근한다고 반대측이 오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독과 오세아니드 역시 누구냐고 묻지 않고 조용히 두 눈과 두 귀로 뱃전에 집중하고 두 손으로는 자기 측의 생존자들이 움직이지 않도록 막는 자세를 취했다.
이윽고 뱃전을 붙잡은 그 손이 힘겹게 무겁기 그지 없는 몸을 끌어당겨 한 사람의 얼굴이 마침내 뱃전 위로 올라왔다. 원래 부하들도 알아보기 힘들만큼 피로와 부상의 고통, 그 이상의 무엇을 담고 있는 하이레이번의 얼굴이었다.
원래 누구의 부하였던지 해적들은 승자가 있다는 사실에 오랜 만에 유라테 여신에게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렸다.
하이레이번은 완전히 배 위로 올라온 후 갑판의 해적들을 천천히 좌에서 우로 훑어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 모두에게 내 배에 승선을 허락한다.”
마치 그 혼자 있던 배에 다른 해적들이 방금 힘겹게 올라온 상황을 묘사하는 듯한 말투였다. 사실과는 일치하지 않는 말이지만, 뱃사람들에게 승선허가는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다른 어떤 예식이나 취임식 따위가 없어도 그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 불복할 해적도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을 확인한 하이레이번이 다시 말했다.
“나를 선장실로..”
미처 말을 맺지 못하고 쓰러지는 하이레이번이 갑판 바닥에 닿기 전에 조금 전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사람들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부하들이 달려들어 그를 부축했다. 이미 기절한 선장은 옛 부하들과 새 부하들의 손으로 선장실에 눕혀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하이레이번(Hayravern), 커세어 마스터.
해적의 대표자로서 위신과 위엄은 있으나 그는 기본적으로 악당이며, 범죄자이다. 민간 수송선의 화물을 강탈하고, 다른 해적을 습격해 죽이고, 사로잡은 자들은 몸값을 받고 팔아넘기는 일이 그의 일상이다. 바다의 여신 유라테의 사제들은 명맥이 끊긴 것이나 다름 없어서 그는 여신의 규범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악당이다. 그를 상대하는 자는 바닷사람의 규율과 해적의 법칙을 참조해야 하며 다른 도덕적 규율은 무의미하다. 바다에서 이익을 얻고 그곳에 머무르며 최고의 해적으로 모든 뱃사람을 두렵게 하는 일이 그의 인생관이다. 최근 신수의 날로 해적활동도 타격을 받았기에 그는 현재 육상에 있으며 재기에 힘쓰고 있다.
하이레이번의 비공식 항해일지2: 칼날 서약단과의 조우
2017.05.22 오후 12:54:25
하이레이번의 비공식 항해일지2
선장실 창문으로 비친 햇살에 하이레이번이 잠에서 깨어 눈을 떴다. 매우 자주 꾸는 꿈을 다시 꾸었다. 조각배 위에서 이미 일어난 상황이 아닌 다른 일이 벌어지는 꿈이거나 그 결투 후에 뱃전을 오르는데 사다리가 늘어나며 영원히 오르지 못하거나, 올라선 배 위가 유령선이라거나, 아니면 지친 그에 대항하여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킨 자기 부하들과 블라디슬로바스의 부하들이 나오는 등등, 내용은 다양하지만 장소나 근본적인 상황은 비슷한 그런 내용이었다.
옷을 차려 입고, 갑판으로 나오자 부하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시독 1항사는 선장이 나온 것을 보고 하이레이번에게 다가섰다. 하이레이번은 손을 들어 인사하는 듯한 동작을 취하다가 돌연 다가오는 1항사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눈을 들어 돛대 위의 망꾼을 바라보았다.
그 때 망꾼의 목소리가 들렸다. “3시 방향 돛대 출현.”
조금만 늦었으면 벌을 받았을 망꾼이 그 사실을 모른 채 다시 외쳤다. “선적 확인 불가. 상선 1척.” 곧이어 다른 말이 들렸다. “선적 확인. 케도라 상단의 대여선.” 가까이 온 1항사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하이레이번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명령을 대신했다. 망꾼보다 먼저 배의 기척을 느낀 하이레이번은 누군가 가져다 준 덱체어에 앉아 1항사의 지휘 아래 전투 준비에 여념이 없는 부하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제는 망꾼이 아니라도 상대편 상선의 상황이 훤히 보이는 거리에 도달하자, 곁에 있던 시독 1항사가 입을 열었다. “어라? 저것들은 뭐야?”
하이레이번의 눈에도 상선 갑판 위로 올라와 도열하고 있는 일단의 무장 병력이 보였다. 딱히 1항사의 혼잣말에 답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이레이번은 이렇게 말했다. “재수없는 그에라 녀석의 칼날서약 용병단이 승객으로 타고 있나 보군.”
1항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선에 화물을 싣지 않고, 용병단을 태웠으면, 배 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을 텐데 그런 조건이면 속도로 승부해서 저 같으면 그냥 달아나겠습니다. 칼날서약단 녀석들은 황금노래 용병단과 달리 전투물자도 많이 싣는 성향이 아닐 테니 용병단 화물도 많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체면이 떨어지면 앞으로 장사가 안 될 테니 싸워볼 생각인 모양인데 소원대로 해주지. 설마 그에라가 직접 지휘하려나?”
“그렇지는 않아 보입니다.” 시독 1항사가 돛대 위로 시선을 주었다가 망꾼이 아무런 추가 보고를 외치지 않는 점을 확인하고 말했다.
하이레이번이 덱체어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도열한 모양세가 딴에는 백병전이라도 기대하는 모양인데 왜 내가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싸워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칼날서약 용병단이 큰 칼만 쓰는 것은 아니니 화살도 좀 쓸 줄 알겠죠.” 시독 1항사의 말을 하이레이번이 간단히 받았다. “해적의 싸움은 배로 시작해야 하고, 가능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말고, 그 배 단계에서 끝내는 편이 좋아. 이게 무슨 대해적의 이름을 걸고 블라디슬로바스와 싸우는 것도 아니니까.” 1항사가 알겠다는 대답을 우렁차게 하면서 하이레이번의 의중에 따라 지시를 내렸다. 자신의 지시가 이행되는 것을 보면서 하이레이번이 다시 덱체어에 앉았다.
싸움의 초반은 하이레이번측에게 매우 쉬웠다. 바람의 방향을 정확히 잡고 선 해적선에서 날리는 투사무기는 역풍을 뚫고 도달하지 못한 상대의 것들과는 달리 상선의 갑판에 선 용병단원의 수를 확실하게 줄여주었다. 물론 칼날서약 용병단도 투사무기에 일방적으로 맞는 상황을 처음 겪는 것이 아니기에 방패 따위를 이용하여 피해를 줄이려 했다. 그러나 이곳은 바다였다. 육지에서는 포위되고 주위 사방에 더해 공중에서도 화살이 쏟아져도 큰 방패를 이용한 수비가 가능하지만, 바다에서는 육지와는 다른 변수가 있었다. 해적선이 움직임에 맞춰 나름대로 최선의 방향을 잡던 상선은 하이레이번이 보아둔 함정을 알지 못하고 바람과 해류의 복합 작용으로 배가 기울면서 심지어 때로는 거의 45도까지 눕혀졌다.
땅에서는 방패를 들고 화살비를 막아내고 있는 병사가 딛고 있는 땅이 갑자기 솟아오르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해상전투에서는 그런 일이 여기 있었다. 또한 가만히 있어도 배는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에 훈련된 선원이 아니면 선상에서 전투 중에 균형을 잡는 일조차 어렵다.
그렇게 충분히 적의 수를 줄이고서야 백병전이 시작되었다. 시독 1항사의 거친 음성이 부하들을 닥달했다. “갈고리 걸어 무슨 일이 있어도 걸어! 이 자식들아!”
부하 해적들은 익숙한 솜씨로 상선에 갈고리를 던졌고, 상당수가 상대 뱃전에 걸렸지만, 수가 줄어들기는 했어도 전투라면 나름대로 익숙하다는 칼날서약 용병단이 그걸 두고 보고 있을 리가 없었다. 칼날서약 용병단 특유의 대형 양손검들이 갈고리를 내리찍자 금속으로 된 갈고리들이 잘려나갔다.
그것을 보자 하이레이번이 덱체어에서 일어났다. “자식들 조금 하네.” 그 맡을 뱉고는 앞으로 달려나갔고, 하이레이번의 아이언후크가 상선을 향해 움직였다. 방금 다른 해적의 갈고리를 잘라낸 이름 모를 용병단원의 가슴팍이 절반으로 우그러졌다. 그렇게 한 명을 부순 갈고리는 그러고도 힘이 남아 상선의 뱃전에 깊이 박혔다.
다른 칼날서약 용병단원이 하이레이번의 갈고리에 대검을 치켜들고 달려들었다. 하이레이번이 그것을 보고 “칼질 하기 전에 총질부터 받아봐라.” 하면서 피스톨 샷으로 그 용병단원을 날려버렸다. 그러자 또 다른 용병단원이 그 역할을 대신하려 했다. 하이레이번이 다시 피스톨을 발사했으나 이번 용병단원은 실력이 더 좋은지 통하지 않았다. 하이레이번은 재밌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 간부 정도는 되나 보는군. 그럼 박힌 갈고리 말고 이걸 잘라봐.” 라고 상대방이 듣지도 못할 말을 하면서 다른 갈고리를 날렸다. 용병단의 간부는 두 번째 갈고리를 피하지 못하고 하이레이번쪽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쳤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벗어나지 못하고 끌려가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이레이번쪽으로 끌려가면서 큰 부상을 매 순간 입고 있었다. 하이레이번은 끌려오던 상대가 미처 이쪽 배로 끌고 오기도 전에 킬홀링에 죽은 것을 알아차리자 그대로 두 배 사이의 바다에 그 간부 용병단원의 시체를 버렸다.
어느 새 양측의 배가 많이 가까워졌다. 하이레이번이 품에서 깃발을 꺼냈다. 하이레이번이 싱긋웃으며 시독 1항사를 보며 말했다. “블라디슬로바스가 이 거리에서 졸리로저를 성공한 적이 있나?” 선장이 일단 전투의 전면에 서자, 하이레이번에게서 명령이 나오면 그것을 반영하여 지휘하기 위해 곁에 있던 시독 1항사가 고개를 저었다. “이 거리에서요? 무립니다.” 하이레이번이 말했다. “맞는 말이야. 내가 아니면 무리지.” 그렇게 말하자마자 해적기가 그의 손을 떠나 두 배 사이의 수면을 가로질러서 상선에 가서 박혔다.
그리고 즉시 하이레이번의 말이 울려퍼졌다. “내 해적기를 욕되게 하지 마라. 가장 먼저 저 깃발 옆에서 적을 처치한 자는 상금 두 배다.” 시독 1항사가 그 말을 듣고 다시 외쳤다. “선장님 말씀 들었지. 가장 늦는 녀석은 갈고리에 달아 바닷물에 넣어 킬홀링을 해주겠다.” 아무도 그 말이 하이레이번이 한 말이랑 다르다고 항의하는 해적은 없었다. 모두가 함성과 괴성과 그 밖의 알 수 없는 단어들을 외치며 부지런히 상선으로 건너갔다.
하이레이번 역시 상선으로 건너갔다. 이미 숫자와 기세에서 밀리는데 하이레이번이 가담하자 칼날서약 용병단의 패색은 절망적으로 짙어졌다. 용병단의 마지막 남은 조장들을 하이레이번의 더스트 데블이 쓸고 지나가자, 그나마 하이레이번의 한 칼을 받아낼 실력자도 없는 상황에서 칼날서약 용병단의 소수 생존자는 마침내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하이레이번의 부하들이 투항하지 않고 저항하는 용병단원을 전원 척살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배가 정리되고 전투의 여파를 피해 한 구석에 있던 이 배를 칼날서약 용병단에게 대여한 선원과 선장이 끌려 나왔다. 이들은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고, 전투가 워낙 싱겁게 끝나서 조용히 숨어있는 것만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고 선내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면 숨어있든 아니든 살 수 없었을 것이다.
하이레이번이 잡혀온 선장과 선원들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으로 배를 다루는 모양이군.”
포로 선장이 그 말에 대답했다.
“그에라 단장과 그리 계약했습니다. 상단 소속 선원을 최소화하고 자기 용병단원들이 일을 분담하는 조건으로 가격을 깎았습니다. 게다가 용병단원을 가득 태워서 만원이 된 배치고는 저희 케도라 상단이 별도로 운영하는 화물도 많이 올렸습니다. 그래서 배를 유연하게 다루기 어려웠습니다. 용병단이 해전을 잘 모르면서 이것 저것 우리에게 전투 중에 이상한 요구를 한 것도 결국은 칼날서약 용병단의 오늘 패배를 가져온 원인 가운데 하나죠.”
“보고에 의하면 무겁기만 하고 돈 별로 안 되는 화물이라던데 운임도 깎아주었다니 케도라 상단이 그래도 되는 건가?”
“선장님 나타나기 전까지 다들 무기 풀고 갑판 닦고 있을 정도로 용병단원들은 나름대로 뱃삯을 계약대로 한 셈입니다. 그리고 화물은 돈이 안 되긴 하지만, 우리는 케도라 상단이니 어디 가야 이득을 올릴 수 있는지 잘 알고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이 대목에서 포로선장이 약간 몸을 세우면서 말을 이었다. “배와 선원 그리고 화물을 풀어주시면 증서를 써드리겠습니다. 우리가 무사히 풀려나는 조건을 담은 증서로 케도라 상단의 어느 지부에 보이셔도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보증합니다. 이 배에 실린 화물 가져가 보셔야 상인이 아니면 제값 받고 처분하기 어렵습니다. 보시다시피 대여선이라 최소 인원의 선원만 태웠으니 몸값도 그저 그럴 것입니다. 저희 상단 신용은 잘 알고 계실 테니 증서를 받으십시오. 케도라 상단에서는 저희가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사실만 확인되면, 두 말 없이 돈을 내드릴 것입니다.”
“그러니까 배와 화물, 얼마 안 되는 선원들 잡아다 처분해봐야 돈 별로 안 될 테니 상단 소속의 선장이 보증하는 증서를 받아라 그게 더 이익이다. 그 말인가? 너희들이 목적지에 잘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 상단에 퍼진 이후 돈을 찾으면 된다 그거고?”
“네, 그렇습니다. 저희 케도라 상단 내부의 정보망은 무척 빠르니 소식을 모든 상단 지부가 공유 하는데 오래 걸리지 않으실 겁니다.”
하이레이번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좋다. 너희 케도라 상단 녀석들은 정말 손해를 보는 일이 없어. 어떤 때는 해적보다 더한 녀석들 같아. 단! 용병단 생존자 녀석들과 그들에게 속한 모든 것은 우리가 챙긴다.”
하이레이번이 동의를 구하는 것이 아니기에 케도라 상단 소속 선장은 동의를 표시하였다. 칼날서약단의 생존한 포로와 그들의 물건이 하이레이번의 배로 옮겨졌다.
그 때 오세아니드 2항사가 하이레이번에게 다가와 물었다. “판자를 준비할까요?”
다른 해적단이나 상선의 선원들을 포로로 잡는 경우, 해적에 가담하든지 아니면 뱃전에 내밀은 판자 위를 걷게 하여 물에 빠뜨려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게 하는 의식을 할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이레이번은 고개를 저었다. “잘 가둬두도록. 올파스 그림과 계약을 맺은 것이 있다. 포로가 조금 더 모이면 한번에 몽크 마스터에게 팔아 넘기도록 하겠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 못하게 적당히 굶겨서 힘을 빼고, 넘길 때 불평 나오지 않게 너무 굶기지도 말라고.”
어려운 명령이었지만, 오세아니드 2항사는 토를 달지 않고, 명령을 따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물러났다. 아무도 없자 하이레이번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에라 녀석, 이 일로 나를 찾아 바다로 나오면 블라디슬로바스 이후 오랜 만에 괜찮은 상대와 싸워볼 수 있겠군.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이번에는 칼로만 상대해주지. 흐음 그러고 보니 크리크가 그에라의 경쟁 상대라는데 크리크란 녀석과 싸울 일이 생긴다면 그것도 재미있겠군. 그렇다면 크리크에게는 블라디슬로바스에게 한 것처럼 머리에 총알 구멍을 내주면 좋겠군. 그 녀석 총도 잘 쓴다니 말이야.”
그 말을 마치고 하이레이번은 이제 막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는 케도라 상단의 배를 일별하고는 선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황금노래 용병단 일지: 참전(參戰)
2017.06.12 오후 2:53:05
황금노래 용병단 일지: 참전(參戰)
슈바르츠라이터 마스터이자 황금노래 용병단의 단장인 워시스가 야전에 설치된 막사에서 총기를 손질하고 있을 때 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뫼시고 들어와라.”
부단장 폴 프엥크는 원숭이 혹은 고릴라처럼 생기긴 했지만, 절대 멍청하지도 둔하지도 않은 사내였다. 그런 그가 평소에 하던 대로 자기 선에서 의뢰를 결정짓지 않았다는 점은 뭔가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었다. 아마도 찾아온 의뢰인 손님의 계약에 큰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야 했다. 아니면 찾아온 손님의 신분이 단장이 직접 만나야 할 정도로 높거나..
“폴라니 영지에서 오신 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폴라니 영지를 대표해 온, 일트렌이라고 합니다.”
워시스가 일어나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고 의례적인 인사가 오가자 일트렌이 아마도 부단장에게 이미 했을 말을 다시 되풀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귀찮은 표정이 얼굴에 나타날 법도 한데 조금도 얼굴에 그러한 기색이 없으니, 자신이 겪는 수고 따위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가 처한 영지의 사정이 급하거나, 아니면 이런 협상에 잘 단련된 사람이 틀림없었다. 얼굴에 초조한 기색이나 염려스러운 표정도 없었기에 워시스는 후자라고 판단하였다.
“저희 폴라니 영지는 선대 공작께서 세 아드님에게 영지를 분할하여 상속하셨습니다. 때문에 작위도 내려가고 각 영지의 규모도 줄었습니다만 최근까지는 이웃한 형제 영주분들이 그럭저럭 잘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최근 맏이이신 영주님이 후계자가 없이 돌아가셔서 본가 영지에 대한 소유권이 자연히 두 분 이웃 형제 영주분들에게로 나눠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 형제 영주님들이 아무도 본가 영지를 반분하는 일에는 동의하지 않아서 결국 무력행사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워시스는 사연 자체는 뻔한 것이지만, 알 수 없는 점이 있기에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씩 나눠 가지는 일을 싫어하는 것이야 사람 욕심이니 그렇다 치고, 우리 왕국에는 영주들 간의 분쟁을 조정하는 의전대신께서 분명히 계시는데 두 영지가 그 지경이 되도록 놓아두셨다는 말이오? “
“아 물론 다른 두 귀족이 서로 영지를 두고 다툰다면야 의전대신께서 당장 사람을 보내 과거의 문서도 조사하시고, 무엇보다 왕국 의전부에 있는 귀족들의 토지대장만 점검해도 누가 옳은지 알아내서 조치를 취하시겠지요. 하지만 왕실은 귀족들이 다스리는 영지 내부의 통치와 행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 않습니까. 영지민에 대한 귀족의 매우 심각하고 부당한 횡포가 있다거나 마족과 결탁을 한다거나 왕실에 모반을 꾸민다거나 여신의 신성에 대한 신성모독을 획책한다거나 뭐 그런 대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고발이나 심증이 있다면, 귀족들을 담당하는 의전대신께서 수사를 하실 테고, 사실로 판명 나면 당장 왕국군이나 왕국기사단이 출동하여 응징하겠지만, 그런 일이 아니라면, 자기 영지를 어떻게 다스리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영주의 권한입니다.”
“그래도 의전대신의 권한으로 시정 명령 정도는 내리곤 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기는 합니다만, 설령 왕국법령을 위반한 영주의 통치 행위도 너무 심각할 정도여야 시정 명령이 내려지는 정도입니다. 지방 영주 처지에서는 의전대신의 시정 명령에까지 저항하는 영주는 없지만, 반대로 시정명령을 내릴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하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그런 시정명령을 받으려면 어지간한 학정이 아니면 안 됩니다.”
“하기는 영지민들에 대한 재판을 항상 멍청하게 한다거나 잘못된 정책을 세워서 흉년이 들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영주는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무능력하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영지 귀족은 없는 것이죠. 영주가 재판을 잘못해도 가까운 성직자를 찾아가 하소연한다든가 정 안 되면, 왕국 수도의 법무대신에게 직소를 하는 방법도 있으니 재판이나 통치가 아주 부당하지 않으면, 백성들도 때로는 득도 보고 때로는 손해도 보면서 사는 것이죠.”
“그럼 이번 사건도 영지 내부일로 간주되어 조정에서는 개입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기도 하고, 본가 영지에 속한 영지민들도 상속자가 없어서 국왕께서 행정관을 파견하여 다스리는 지역보다는 선대 영주님의 아드님이 다스리면 좋겠다고 원하고 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상속자가 없어지거나 영주가 죄를 지어서 귀족 지위를 박탈당하면 해당 영지는 왕국 직할령으로 편입되고 행정관이 파견되어 다스리지 않습니까? 뭐 그러다 누군가 공을 세우면 귀족이 되면서 상으로 임자 없던 그 땅을 영지로 받기도 하고요. 뭐 하여간 행정관들은 임기 채우고 왔다가 가는 사람이니까 영주만큼 해당 지역에 애정을 지닐 리가 없고, 정말 착하고 총명한 관리가 부임해도 몇 년 있으면 떠나기 마련이고 행여 멍청한 관리라도 부임하면 큰일이죠. 그래서 대개는 영주가 장기 통치하는 편이 나은 게 사실이고, 특히 우리 지역은 선대 영주께서 선정을 베푸셔서 아직도 인기가 높습니다.”
“흥, 우리 왕국의 영주들이 비교적 괜찮은 이유는 그 위에 그들을 통제하는 왕국법이 있고, 바로 옆에는 여신의 신탁을 즉각 받을 수 있는 사제들이 어디나 있기 때문이야. 비슷한 수준의 통치자가 다스린다면 임기가 짧아 자주 교체되는 행정관보다는 종신토록 다스리는 영주들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정책을 세우고 일관성 있게 유지하는 것이 더 나을 수밖에 없지. 딱히 영주들이 행정관보다 잘나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
“뭐 어쨌거나 형식상 이 사건은 비록 지금은 세 개의 독립된 영지지만, 원래는 하나의 영지가 나뉜 지도 오래되지 않았고, 영지민들도 재통합을 원하고 하니 의전대신께서도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고 맡긴 셈이 되었습니다.”
“아니 의전대신께서 너그럽게 영주들과 지역민들에게 재량권을 주셨으면 감사하게 생각하고 의논이나 잘할 것이지 뭐 잘났다고 싸움질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지?”
“싸움 안 했습니다. 앞으로도 안 할 거고요. 싸움 안 하는데 말로도 결판이 안 나니 문제이고, 저희에게 그런 문제가 생겼으니 마스터님 같은 분도 용병일로 돈 버시는 것 아닙니까?”
“흠, 알겠어. 영지병이나 영지민들을 동원해서 사상자가 나오면 조정에서 그냥 둘 리 없으니까 직접 싸울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말싸움으로는 백 년이 가도 결판이 안 날 테니 용병단을 고용해서 대신 싸우겠다 그런 이야기네. 다 좋은데 그냥 의뢰를 받아들이고, 요약해서 보고하면 됐을 일을 의뢰인을 직접 내게로 모셔온 진짜 이유가 뭐지? 폴.”
워시스는 간접적으로 의뢰인 혹은 의뢰인 대리인을 직접 만날 필요는 없었다는 말을 한 셈이고, 자칫하면 상대방을 무시하는 것으로 비췰 수도 있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물었다. 부단장 폴 프엥크가 간단하게 답함으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상대측이 고용한 용병단이 칼날서약이랍니다.”
“뭐야? 내가 그에라를 두려워할 것 같다는 건가? 아니면 상대가 그에라이니 의뢰인께서 단장에게 직접 확언을 듣고 싶다는 건가?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지. 오히려 이런 상대하고 적당한 보수까지 받으면서 싸울 기회와 경험이 흔하지 않을 텐데 잘된 일이야. 의뢰는 받아들이겠소. 세부적인 계약 내용은 우리 부단장과 조율하면 되겠소.”
그런 말과 간단한 인사로 상대방을 내보내고 워시스 크리크는 흡족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거 모처럼 기대되는걸.”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워시스 크리크(Warsis Creak), 슈바르츠라이터 마스터.
슈바르츠라이터 마스터이자 황금노래 용병단의 단장.
군인으로서 최상급의 인물이며 개인전투력, 지휘관으로서의 전략/전술적 능력은 물론 정치, 사회, 문화적 교양도 적지 않고 다방면에 총명하다.
총기든 다른 무기든 전쟁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받아들여 시험하고 적용하는 개방적 사고를 지녔으며, 자신의 용병단원을 전우로 여기고 이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용병단이 돈을 번다고 생각한다. 그가 왕국군에 봉사하지 않는 이유는 왕국법에 묶인 정규군에서는 그가 원하는 다양한 무기와 전술을 시험해 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황금노래 용병단 일지: 종전(終戰)
2017.06.14 오후 12:46:27
황금노래 용병단 일지: 종전(終戰)
“이건 월권입니다. 장군!”
슈바르츠라이터 마스터 워시스 크리크가 목소리를 높여 자신과 마주 보고 앉은 비슷한 연령대의 청년에게 말했다. 장소는 그의 야전 막사였고 간단한 탁자를 두고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단둘이 마주 앉은 자세였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하는 맞은 편의 청년은 왕국군의 라민 장군이었다.
“아니라고요? 영지 간의 분쟁은 의전대신의 권한입니다. 베이키얼 의전대신께서는 이곳 영지민의 의향과 선대로부터의 인연을 고려하시어 특별히 이번 영지 분쟁 건을 당사자들에게 일임하셨단 말입니다. 물론 영지민의 생명과 재산을 절대 다쳐서는 안 되고, 상대측 영지병과는 전투가 가능하나, 부상자는 몰라도 사망자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단서가 달려있긴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이것은 군부가 개입할 일이 아닙니다. 민간 귀족의 영지 다툼에 왕국군이 간섭한다면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앞다투어 군무대신께 항의할 테고, 국왕께서도 절대 묵과하지 않으실 겁니다.”
“물론 군무대신께서는 의전대신의 권한에 간섭할 권리도 없고, 그럴 의향도 없습니다. 그건 왕실 친위대인 왕실기사단이나 군부의 다른 장군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내 눈앞에 왕국군의 라민 장군이 있고, 그분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 전혀 신뢰성이 없군요.”
“공식적으로는 나와 동료들은 휴가 중입니다. 물론 군무대신께서는 휴가기간 중 왕국 각지를 다니며 군사 용지로 사용할 땅을 물색하라는 겸사겸사의 명령도 함께 받긴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막 주인을 잃은 땅이 있는데 군사적으로도 괜찮은 땅인 것 같으니 이 땅을 확보하려 합니다. 따라서 이 영지를 두고 다른 귀족들이 다투는지 마는지 그 귀족들이 용병단을 고용해서 오랜 시간 대치 중인지 아닌지 그런 상황은 우리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영지분쟁이 없었어도 우리는 여기를 군사용지로 전용하려 했다는 것이 우리의 공식적인 입장입니다.”
워시스 크리크는 라민 장군의 말을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왕국군 장군 라민의 공식입장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라민 장군님의 실제 처지가 무엇인지 듣고 싶군요.”
“네, 사실 영지 분쟁이 없었다면,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군사용지 운운하며 끼어들지 않았을 겁니다.” 이 말을 한 후 라민 장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마스터 워시스 크리크.” 슈바르츠라이터 마스터 워시스 크리크는 라민 장군이 돌연 무게를 잡고 자신의 직함과 이름을 부르자 자세를 가다듬고 상대를 보았다. 라민 장군은 워시스 크리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자 다시 입을 열었다. “정말로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행위는 명백히 월권이 맞습니다. 의전대신의 일에 끼어드는 것도 맞고, 상부에서 맡긴 일도 아닌데 몽크 마스터 올파스 그림과 크리오맨서 마스터 알리스터 크로울리에게 주목하고 있으며, 또한 별의 탑이 그 강대한 무력의 화살을 갑자기 언제 어디로 돌릴지 걱정스럽습니다. 그리고 지금 언급한 사항들은 왕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혹은 위협할 수 있는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군인의 입장에서는 공식적으로는 간섭할 수 없고, 실은 관심을 지니고 관찰하고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 큰일 날 일입니다. 만약 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때야 개입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순전히 정론으로만 말한다면, 정작 일이 벌어지면 왕실과 조정의 명을 받아 군을 이끌고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군인의 본분이 아닙니까?”
“그런 딱딱한 정론이 싫어서 장차 왕국의 대장군감이라는 평가를 팽개치고 용병단을 만들어 나가신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가 솔직히 말씀드리는 것은 마스터 크리크님이라면 말이 통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민 장군께서는 일단 일이 벌어지고 나서 군을 동원하면 왕국에 끼치는 피해가 클 테고, 부하들도 다칠 테니 고지식하게 원리원칙을 지키면서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그러니 불법적인 일이 아니라면 뭐라도 해야겠다. 뭐 그런 견해를 지니고 계신 거군요.”
“그렇습니다. 왕국법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당연히 나쁜 사태가 일어나기 전에 예방하고 준비하는 것이 왕국군의 장군된 자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저도 그 견해에 마음이 끌립니다. 다만 제가 왕국의 대장군감이라는 평가는 사양하겠습니다. 그건 라민 장군 본인을 위해 남겨두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제 위로 경륜 높고 무예가 뛰어난 장군들이 적지 않습니다. 왕국군 총사령관 자리에 제 차례는 오지 않을 듯합니다.”
“겸양은 그쯤 해두시고, 하던 말씀을 계속 하시죠.”
“베이키얼 의전대신은 누가 봐도 탁월한 능력을 지닌 관료고, 총명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프리미어 에미넌트의 명성을 이을 명재상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몇 년간 이분의 일 처리를 보면 개별 사안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미묘하게 눈에 거슬리는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번 영지 분쟁이 딱 그런 사례입니다. 선대 영주의 선정을 기억하는 영지민들은 돌아가신 영주님의 아드님들인 두 분 영주 가운데 아무나 통치해도 좋으니 둘 중 한 분으로 정하는 태도고, 의전대신은 그렇다면 크게 다투지만 않는다면 알아서 자체적으로 해결하도록 해주겠다. 다만 이런저런 선은 넘으면 안 된다. 겉으로는 나무랄 곳이 없는 조치입니다만….”
“만약 양측 영주가 고용한 용병단이 칼날서약단과 황금노래단이 아니었다면, 사태가 지금처럼 지킬 것 지키면서 대치국면의 전투로 흐르지는 않았겠죠. 결과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건 영지민들이나 용병단의 책임이 되지만, 의전대신에게는 분쟁을 유도하고 심지어 확대하려는 교묘한 의도가 숨어있는 것 아니냐? 물론 증거는 없지만… 뭐 그런 이야기가 되는 겁니까?”
“역시 총명하시군요. 마스터 크리크. 증거만 없는 게 아니라 이미 말씀드렸듯이 과정과 논거가 뚜렷해서 아무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저는 두 분 마스터와 용병단이 이곳에 묶여 있는 사실이 다른 효과를 어딘가에서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하고 있습니다.”
“장군의 말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본격적인 우리 일에 들어가지 전에 해결하고 싶은 호기심 거리입니다만, 마스터들과 별의 탑도 주의 깊게 보신다고요.”
“크리크님 자신 역시 마스터니 잘 아시겠지만, 마스터의 지위는 특별히 왕국에서 따로 작위를 받지 않아도 상급귀족의 대우를 받습니다. 물론 그보다 중요한 문제는 마스터는 실력으로 쟁취하고 인정받는 자리라는 점입니다. 그런 능력자들인 마스터 가운데 그 능력을 사적으로 이용하려 든다면 장차 큰 위해가 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럴 가능성이 높은 마스터라고 생각되는 분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하지만 마스터 가운데는 원래부터 나쁜 사람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커세어 마스터 하이레이번 아닙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로멜 국왕께서 왕국 해군을 보충하기 위해 해적 선장들을 사략선장으로 임명하시고 마스터의 지위를 상징하는 증표를 내리신 일은 이제라도 철회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할 해적 녀석들이 무려 800년 전에 받은 증표를 대대로 이어받으면서 왕국이 공인한 해적 마스터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일은 이제 막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나 선대 국왕의 증표를 철회시키는 일은 어렵고, 그 증표는 분명히 실력으로 서로 뺏고 뺏기면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니 실력을 증명하여 오르는 자리인 마스터라는 자리의 성격에 부합하는 바가 있다는 내용이 600년 전 카듀멜 국왕의 포고문에 담기는 바람에 후대 국왕들께서도 결국 그 증표를 무효화하지 못하고 결국 오늘날 하이레이번의 손에까지 들어갔고, 자기도 나라의 인정을 받는 마스터입네 할 수 있는 것이죠.”
“불경한 언사이긴 하지만, 그것만 봐도 누가 뭐라 해도 카듀멜 국왕은 좋지 못한 군주였습니다.”
“왕국에 카듀멜 국왕이 폭군이었다는 사실 모르는 사람 있습니까? 그 이야긴 그만하지요.”
“제가 해군 소속이 아니라 하이레이번을 직접 토벌할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별의 탑도 걱정하신다고요? 그것은 정말 의외입니다. 샤펜스타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왕국의 든든한 동맹이고 지금 가이캉 메켄 단장도 괜찮은 사람 같은데 말입니다.”
“네, 저도 그들이 전통이 변하지 않고 수 세기를 이어온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지금 메켄 단장도 능력과 성품 모두 괜찮다는 평가도 동의합니다. 다만, 샤펜스타는 수도 많고, 실력도 장난 아닌데 자치권까지 지니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들이 초대 단장 리디아 샤펜의 유지를 잘 이어왔지만, 앞으로도 그런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순수한 군인의 관점으로 보면 지금 당장 샤펜스타가 별깃든 호수를 영토로 하여 독립국가를 세운다고 나서도 왕국군은 속수무책입니다. 세상에 난공불락의 요새는 없으며, 어떤 요새라도 보급이 끊기고 장기적인 포위를 당한 채 외부의 지원을 받지 못한다면 함락당하기 마련이다…”
“글칸 도니휴의 저서, 전쟁론 제3장에 나오는 말이죠.” 워시스 크리크가 그렇게 말을 끊었지만, 라민 장군은 평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개국공신이며 명장인 글칸 도니휴 장군의 말씀과는 달리 별의 탑은 정말 난공불락입니다. 현실은 이론을 종종 초월한다고나 할까요? 만약 샤펜스타 단원들이 별의 탑에 박혀서 농성을 하고 그들이 늙어서 활시위를 당기지 못할 정도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거길 점령할 수 있다면, 그건 사실상 난공불락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신께서 도와주시는 행운이 없다면 자카리엘 대왕과 개국전쟁 당시의 명장들이 모두 살아 돌아오신다고 하여도 별의 탑을 함락하는 방법은 샤펜스타 단원들이 늙어 죽길 바라는 방법밖에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론과 달리 농성 요새는 내부의 배신자 한 명으로도 무너질 수 있습니다.”
“네 실제 역사에서는 왕왕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문제는 별의 탑을 상대로는 그런 행운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다는 점입니다. 저는 왕국의 장군으로서 언제든지 자신들의 마음만 바꿔 먹으면 왕국법 따위는 무시하고 살 수 있는 집단이 있다는 그 가능성은 항상 주시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한담은 이만 해두고 우리 앞의 일을 다시 논의하죠. 그래서 라민 장군께서는 현재 이 영지분쟁과 두 용병단의 대치 상황을 어떻게 타파할 생각입니까?”
“현 상황을 보면, 마스터 그에라님이나 마스터 크리크님이나 서로 어쩌지 못하고 대처하고 노려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양측 영주님들이 줄 돈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시간을 끌수록 두 분 다 금전적으로 손해인데 몇 차례 붙어봤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고,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붙으면 다치고 죽은 부하들 보상금 지급하느라 두 용병단 모두 손해가 막심할 겁니다. 용병단장 앞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용병이란 것이 적당히 밥값 하는 척, 싸우는 척만 하기도 하고, 오늘은 사상자가 예상보다 많이 나와서 위로금과 보상금 지급하려면 손해가 막심하니 서로 그만 싸우자고 무언의 합의를 하기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제게 용병단의 생리에 관해서 설명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상황을 종식시킬 필요성 특히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특징인 용병단으로서 필요성은 저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돈 밝히는 용병은 그에라만 그러는 줄 알지만, 저라고 해서 경제관념이 없으면 용병단을 어떻게 운영하겠습니까?”
“알겠습니다. 간단히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곳을 떠나십시오. 마침 듣자 하니 빠른 시일 내에 왕국 수도로 돌아가 투기장 운영자 프리엄이 양성한 검투사들을 부하 용병단원으로 받아들일 계약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 계약 건을 놓치면 날리는 것은 선금을 포함해서 여러 가지 아닙니까? 그보다는 지금의 영지 전투 계약을 망치고 당장 출발하십시오.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니 성공보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지고 물러나도 일정 액수는 받기로 계약하셨을 테고, 여기서 이겨서 성공할 경우 받기로 되어 있는 추가 사례금을 받으면 모를까 머물다가 지기라도 한다면 이중의 손해 아닙니까? 이런 경우 위험 부담을 최소로 줄이고 어떤 경우에도 가장 적게 손해 보는 길은 지금 당장 떠나는 것입니다.”
“돈만 생각하면 그것이 합리적이고 최소의 위험 부담을 지는 일이지만, 그래도..”
“저와 제 부하들이 지금 크리크 마스터님이 차지한 이곳을 지키겠습니다. 그럼 칼날서약단은 절대 우릴 공격하지 못합니다. 왕국군을 공격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고, 설령 진짜로 전투가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저와 부하들은 기쁠 겁니다. 마스터 그에라의 실력을 직접 경험하는 일은 짜릿할 것 같습니다.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이런 대가와 붙을 기회가 있겠습니까?”
“법적으로 문제가 있을 텐데요?”
“말씀드렸듯이 마스터 그에라와 그의 칼날서약단이 차지한 성채를 군용으로 내놓으라고 우길 겁니다. 의전대신과 군무대신에게 사람이 왔다 갔다 하고 조정에서 설왕설래 의견이 오가다가 결국 저에게 물러서라는 명령이 내려오겠지만, 시간은 많이 걸릴 겁니다. 상부의 군용지 탐색 명령을 확대해석했다고 징계를 받을 수도 있지만,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혹시 수도에 있는 제 상관이신 빈센타스 장군님과 동료 장군들이 잘해준다면 정말로 군용지로 인가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두 분 마스터를 고용한 두 영주님은 완전히 망한 거죠. 사실 이건 의전대신의 권한이니 그렇게까지 일이 잘되리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틸레니스 왕자님이나 카오닐라 공주님 같은 왕실분들도 군부에 호의적이시고 제 친구인 헤오샤 장군이나 앨러너데일을 좋아하시니 그런저런 상황을 고려하면 그래도 최소한 징계 수위가 강등까지 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감봉이나 무급 정직 정도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왕 그럴 작정이라면, 군용지로 수용하는 것은 물론이고 주둔 비용까지 분쟁 영지에서 징발로 감당하겠다고 주장하는 편이 낫겠군요. 두 영주분 가운데 누가 분쟁 영지를 차지해도 거기서 나오는 소출은 고스란히 본성을 차지하고 주둔한 왕국군의 유지비용으로 들어가서 실질적으로는 건질 것이 없도록 말이죠.”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 무리한 요구를 내세우면 두 분 영주도 생각을 다시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면 적당히 영지를 반분하자는 협상안이 다시 나오면 이전과는 달리 진지하게 고려해볼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 협상안은 마스터 그에라가 내놓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나는 이미 떠난 후가 될 테니 그에라도 뭔가 이 분쟁의 종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명분을 건지고 나름대로 성공보수를 두 영주에게 반분시켜 받을 가능성도 생길 테니까요.”
“뭡니까? 그건 경쟁자지만 그래도 동종업자에 대한 배려입니까? 하하.”
“그렇다고 해두죠. 좋습니다. 즉시 철군할 준비를 하도록 명령하겠습니다. 하지만 제 고용주와 그분의 영지병들이 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마스터 그에라에게 당하지 않도록 철저히 지켜주셔야 합니다.”
“이 라민이 그렇게 못 미더우십니까? 그래도 나름대로는 왕국군에서 쓸만한 장군이라는 것이 평가인데 말입니다.”
“믿지 않는다면 철군도 안 합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크리크.”
“좋은 제안을 들고 와서 고맙습니다. 라민 장군.”
두 사람은 일어서서 야전 탁자 위로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는 것으로 대화를 마무리하였다.
투기장의 주인
2017.06.19 오후 2:00:01
투기장의 주인
쾅 하는 거친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프리엄의 방에 들어섰다. 발로 차서 열지 않았다 뿐이지 들어서는 태도와 문을 여는 난폭함은 들어선 여자가 몹시 화가 나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프리엄은 천천히 탁자를 짚고 의자를 뒤로 밀면서 일어나 인사를 했다. “이런 이런 제 방까지 직업 왕림해주시다니 부르시면 제가 달려갔을 텐데요. 어찌되었건 영광입니다. 마스터.”
들어선 여자, 무르밀로 마스터 펠릭시아는 흥분한 모습 그대로 다가와 양손을 꺾어 강하게 프리엄의 탁자를 짚은 다음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대진표를 바꾼 겁니까?”
“그야 제 마음대로죠. 아시다시피 투기장의 연간 월간 주간의 모든 행사와 일정을 비롯해 재정관리, 인력관리 기타 등등의 행정업무를 하는 것이 제 책임이고 권한이지 않습니까?”
펠릭시아는 상대의 뻔뻔한 그러나 반박할 수 없는 사실에 기초한 답변에 더 화가 났지만, 화는 나는데 딱히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머뭇거렸다. 그러자 프리엄이 말을 이었다. “네, 제가 조금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말씀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마스터께서 하셨어야 할 바른 질문은 이런 것이겠지요. 누구 마음대로 대진표를 바꾼 거냐가 아니라 왜 대진표를 바꾼 것이냐? 대진표를 바꾸고 조정하는 것은 제 책임과 권한이지만, 그것이 합리적으로 정당하게 이루어졌는지는 마스터께서도 충분히 관심을 지닐 권리가 계시니까 말입니다.”
“그.. 그래. 그렇소. 그런 얘기였지. 맞아. 암만. 흠흠. 그러니까 내 말이 그 말이오. 왜 대진표를 당일에 갑자기 멋대로 바꿨소?”
“절대로 멋대로 바꾸지 않았습니다. 다 투기장에 오시는 관객의 흥미를 높이고, 그로써 투기장의 이익을 높이고자 하는 투기장 운영을 맡은 책임자의 고민이 담긴 선택입니다. 마스터께서야 관중들 앞에서 싸움만 하시면 돈이 저절로 들어오고 투기장 운영이 그냥 굴러가는 줄 아시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솔직히 제가 투기장을 운영한 뒤로 펠릭시아님에게 들어가는 배당금도 훨씬 늘어났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 그건 사실이지만, 에이.. 하여간 내 말은 왜 내 제자의….”
“제자분의 순서를 바꾼 것은 말씀 드린 그대로 흥행을 위해서입니다. 솔직히 말이 제자지 나이차도 별로 안 나는 분들이 마스터님을 중심으로 모여서 무리를 이룬… 아 뭐 단체라고 해두지요. 아무튼 단체를 이룬 것이고, 오늘 순서를 변경한 사람은 그 일원 아닙니까? 그게 무슨 공식적인 단체도 아니고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관객들은 그 사람이 무르밀로 마스터 제자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마스터분의 친구인지 전혀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저 싸움 좀 하는 친구가 요새 좀 승률이 높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죠. 뭐 시간이 지나면 알고 보니 누구 제자라더라 누구 친구라더라 소문도 퍼지고, 그러면 흥행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현재까지는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대전 순서라도 바꿔서 흥미진진해야죠. 이기면 뭐합니까? 다음에 누구랑 붙을지 궁금하지 않은 사람은 백날 이겨봐야 도움이 안 됩니다.”
“그래서 누구랑 붙일 건데?”
“그건 비밀입니다. 그래야 호기심이 높아지고 흥행이 됩니다. 어제까지 7연승한 아무개가 오늘은 정체불명의 투사와 예측할 수 없는 추첨으로 한판 붙을 거라고 이미 왕도 곳곳에 홍보 중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오늘 그 덕분에 사람 더 올 겁니다. 그러면 투기장에 지분을 지니신 펠릭시아 마스터님도 도움이 될 겁니다. 배당금 받으시면 그 주위 제자라는 분들에게 베푸시는 거 제가 언제 뭐라고 했습니까? 이번에도 뜻대로 하세요. 하지만 특별한 이유 없이 제가 공들여 만든 기획과 행사 일정에 참견하시지 말고 말입니다.”
“지분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신이 투기장 지분의 최대 소유자지만, 과반 소유자는 아니야. 그러니까 너무 나대지 말라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힘없는 상인에 불과합니다. 펠릭시아 마스터 같으신 분들이 넘쳐나는 곳이 여기입니다. 제가 불법적인 수작을 부리다 걸리면 왕법에 의해 데포에트 법무대신 앞에 가기도 전에 투기장 마스터 분들 창날 맛을 먼저 볼 곳입니다. 제가 그렇게까지 용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용기 이야기가 나와서 말입니다만 뭐 정 겁이 나시면 지금이라도 다시 바꿔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누가 겁을 먹는다는 거야? 절대로 그런 일 없어. 투기장에 서는 자, 상대가 누구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래도 다음부터는 내게 먼저 통보라도 해주도록 하라고요.”
펠릭시아가 끝에는 약간 부드럽게 말을 하면서 방을 나가자 그 등에 대고 프리엄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마스터.”
펠릭시아 무르밀로 마스터가 나가고 다시 혼자가 되자, 프리엄은 다시 탁자에 의자를 당겨 앉아 사무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없는데도 누군가 그의 앞에 섰고 말을 걸었다. “바쁜가?”
프리엄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앞에 선 사람에게 예의를 표했다. “오셨습니까? 마스터.” 호칭은 같은 마스터였고, 말투도 똑같이 공손했지만, 프리엄의 어조에는 펠릭시아를 대할 때와는 다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은 공경심이라기 보다는 진심이라고 할 것이 담겨있다고 보였다. 프리엄의 방에 둘 만이 아는 통로를 통해 들어온 사람 즉, 몽크 마스터 올파스 그림이 말했다. “특별한 사항이 있나?”
“펠릭시아가 바뀐 대진표에 반발해서 왔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러니 예정대로 진행하시면 되겠습니다. 가능하면 한 방에 죽여버리십시오. 7연승이나 했다니 괜찮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약할 줄은 몰랐다 뭐 그런 식으로 몰고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지. 무르밀로든 뭐든 투기장 관련된 마스터들 추종자의 숫자가 너무 늘어나면 곤란하니까 가끔 적절하게 숫자 조절을 해야지. 그래도 내가 직접 나서야 할 정도니 꽤 하는 친구 같군.”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연승하지 못하도록 대진표를 조정하고 시합 사이의 간격도 조정해서 불리하게 했는데도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무르밀로 마스터를 따르는 자들이 많은 건 곤란합니다. 그리고 그 녀석 죽으면 펠릭시아가 유족들 돌본다고 돈을 쓸 테니 배당금 받아도 지갑은 텅 빌 겁니다.”
“좋아. 다른 일은?”
“하이레이번이 포로를 꽤 모았다고 거래 일자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정하자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누가 왔지?”
“오세아니드인가 하는 여자 같은 이름을 지닌 주제에 팔에는 뱀 문신 한 녀석 기억하십니까? 그 녀석입니다.”
“알겠네. 또 다른 일은?”
“니모켄이 온답니다. 직접 만나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그래. 레인저 마스터는 가능한 적게 마주치는 편이 좋지. 그쪽에는 계속 빚을 지어두는 편이 좋아.”
“그러고 보니 곧 올지 모릅니다.”
“그래 일단 갔다가 다시 와서 다음 일들을 이야기하도록 하지.”
올파스 그림이 사라지자 프리엄은 다시 제 자리에 앉아 서류를 보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십시오.” 프리엄이 말하자 문이 열리고 레인저 마스터 니모켄이 들어섰다.
“아이고, 마스터께서 머나먼 클라페다에서 여기까지 어인 일로?”
니모켄이 다가오며 프리엄의 탁자에 돈주머니를 올려 놓으며 말했다.
“그 가식적인 모습은 여전하군. 분명히 오늘이 이자 내는 날 아니던가?”
“아니 뭐 그런 일로, 이 먼 길을.. 제가 언제 이자 제 날짜에 꼬박꼬박 내라고 했습니까? 조금 밀리셔도 됩니다.”
“그래 놓고. 나중에 이자 안 냈다고 무슨 생트집을 잡으려고 내가 그 속을 모를 것 같은가?”
“이자는 채무 관계 규정상 형식적으로 기재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기간도 분기에 한 번 소액으로 받는 것 아닙니까? 이자 받을 생각이었으면 케도라 상단에 예치했죠. 빌려드린 금액을 거기다 예치하고 이자를 쌓이도록 두었으면, 케도라 상단 VIP 명단에 제가 드루이드 마스터 지나 그린님 다음으로 적혀 있을 겁니다.”
“그런 돈을 일반적인 이자를 받고 빌렸으면, 드루이드 마스터라도 파산했을 거야. 나도 애초에 그런 무리한 융통을 하지도 않았을 테고…”
“에이 무슨 말씀을.. 지나 그린님의 재산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시는군요. 제게 투기장이 10개 있어서 몽땅 판다고 하더라도…”
“됐어. 그런 말은 더 듣고 싶지 않아. 그래서 오늘은 올파스를 볼 수 있는 거야?”
“올파스님은 바쁘셔서 그렇지 않아도 제가 오신다는 말을 듣고 열심히 말씀 드렸는데 요즘 수련에 집중하시느라 힘드신가 봅니다. 어쨌거나 수련을 바탕으로 신심을 키우는 성직자시니까요.”
“그런 성직자가 돈놀이를 하고 있지.”
“아니죠. 돈놀이는커녕 돈 관리에 서투신 성직자시니까 저 같이 돈에 밝고 믿을만한 사람에게 재산 관리를 대신 시키고 계시는 것이죠.”
“내가 오늘 당신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그 말을 믿지 않을 수 없겠지만, 처음이 아니라 다행이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휴… 사람들은 파드너 마스터가 돈만 아는 성직자라고 하지만 그건 드러난 현상만을 보고 하는 소리지. 사실은 파드너 마스터는 발치도 못 따를 엄청난 성직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야.”
니모켄이 이렇게 말하자 그 때까지는 능글능글한 태도로 니모켄을 상대하던 프리엄이 낯빛을 고치고 그러나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몽크 마스터님을 조금 아는 사람들은 몽크 마스터님이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 없다고 하지만 그거야 말로 드러난 현상 만을 보고 하는 이야기죠. 우리 마스터께서는 돈에 관심을 지니신 게 아닙니다. 그분의 눈은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목표는 성직자의 이상과 배치되지 않습니다. 범인들이 이해하든 말든 그렇습니다.”
“충성스러운 부하군. 그런 충성스러운 부하가 투기장의 이득을 빼돌리고 있다는 사실을 올파스가알면 어떻게 될까?”
프리엄이 미소를 더 짙게 하며 답했다. “투기장의 주인은 공식적으로 접니다. 아, 정확히는 최대 지분 소유자이지요. 어쨌거나 제가 거둔 이득 중 일부를 몽크 마스터께 기부하는 행위는 완전히 합법적인 일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주 신성한 종교적 헌금입니다. 제 배당금을 제가 가지는 것이고, 제가 주고 싶어서 헌금을 내는 것이지 아무도 무엇도 빼돌리는 행위는 전혀 없습니다. 여기는 왕국 수도의 투기장입니다. 수많은 귀족고관과 때로는 국왕께서도 관람하시고 관심을 기울이시는 곳인데 그런 비리가 있을 리가 없지요.”
니모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가 더 이상 당신들에게 빚진 것이 없는 날이 오면, 법무대신께 제 발로 찾아가 자수하는 편이 좋을 거야. 안 그러면 내가 자수할 테니까. 물론 자수할 때 밝힐 나의 죄목은 증명하거나 정당화 할 수 없는 사적인 복수에 기반한 살인의 행사가 되겠지.”
“휴우… 죄송하지만, 제 머리를 언급한 사람은 이제까지 적지 않았고, 그 사람들 중에 마스터분도 적지 않았으나 놀랍게도 아직도 제 머리가 제 몸에 붙어있다는 사실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한 프리엄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그러나 이전보다 더 강력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였다. “또한 레인저 마스터께서는 레인저들의 수장으로서의 명예는 물론이거니와 샤펜스타의 단원이었던 사람으로서 리디아 샤펜의 이름까지 걸고 맹세를 하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어디 가서 우리 사이의 일을 언급하시는 일은 없다고 믿습니다. 최소한 저희에게 지신 빚을 갚을 때까지는 말입니다.”
“좋아. 알아들었어.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을 피해 다니는 편이 낫겠군. 뭔가 어려우면서 나쁜 일을 시키려고 할 그 속셈이 뻔하니까 말이야. 뭐 이자는 꼬박꼬박 대신 보낼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그렇게 말하고 니모켄은 대답은 굳이 들을 필요 없다는 태도로 방을 나섰다. 그래도 프리엄은 인사를 했다.
“클라페다까지 평안한 여행을 기원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그렇게 세 번째 방문자를 보내고 프리엄은 다시 일을 하기 위해 탁자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늘의 방문자는 아직 더 있었고 그 사람들은 프리엄의 예정에는 없던 사람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올파스 그림(Olfas Grimm), 몽크 마스터.
몽크 마스터이자 반목의 중심이다. 자신만의 독선적인 계율을 따르기 때문에 일반적인 도덕적 기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다. 매우 영리하며 그의 성격을 알든 모르든 그에게 피해를 보기 쉽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그러므로 상대에 따라 보여주는 성격이 달라지기도 한다.
세상은 그를 이기적인 인간이라 하지만, 그는 수행자는 본시 고독하다고 주장한다. 몽크는 기도와 제례를 완전히 배제하는 성직자는 아니나 그보다 신체단련을 통한 수련자이기에 이를 통한 자기확신이 강하다는 점에서 다른 성직자와 큰 차이를 보인다.
투기장의 주인 2
2017.06.22 오후 6:28:09
투기장의 주인 2
시간이 흐르고 이번에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였는데 프리엄의 태도는 그가 마스터에게 보이던 태도보다 한결 더 공손하였다. 올파스 그림을 상대할 때만큼의 진심은 없었으나 태도 만은 그에 못지않다고 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해 니모켄이나 펠릭시아에게 한 것보다는 조금 더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프리엄이 크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면서 말했다.
“헤오샤 장군님과 앨러너데일님이 이런 곳까지 와주시다니 영광입니다.”
남자가 앞에 나서며 말했다. “너무 환대를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프리엄도 나름대로 온갖 예법에 능숙하다고 자부하는 사람이었지만, 이 남자처럼 자연스럽게 궁정 예법을 몸으로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여하간 프리엄은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응했다.
“궁정악사장이시자 계관시인을 이렇게 직접 뵙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국왕 폐하의 과분한 영광을 입었을 뿐, 허명만 있는 시인이며 음악가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분이 여기 있죠.” 그렇게 말하면서 동행한 여자를 가리켰다.
“알고 있습니다. 왕국군 제일의 무예를 지니셨다는 헤오샤 장군을 어찌 모르겠습니까? 과연 가까이서 뵈니 기세가 대단하십니다. 제가 무예는 모르지만, 투기장을 운영하다 보니 검투사는 많이 봐서 무사들의 위엄에 쉽게 움츠러들지 않는데 헤오샤 장군님은 척 봐도 다르십니다.”
헤오샤는 프리엄의 칭찬에 형식적인 반응을 보였고, 분위기를 이끄는 사람은 앨러너데일이었다. 주고받는 인사성 대화가 대충 마무리되자 비로소 대화는 용건에 들어갔다.
“라민 장군님은 다음 주의 투기장 행사가 이제까지와 달랐으면 하십니다.”
프리엄이 알기에 라민 장군과 헤오샤는 같은 계급의 장군이었다. 그리고 앨러너데일은 계통은 다르지만, 여하간 관직에 있는 몸이고 궁정악사장이니 조금도 존칭을 쓸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헤오샤는 국왕의 장녀이신 카오닐라 공주와 절친한 사이라고 하니, 반대로 그녀가 위세를 떨고 다니며 같은 계급의 다른 장군들을 무시하고 다녀도 될 상황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헤오샤와 앨러너데일은 라민 장군이 마치 상급자나 대장군이라도 되는 듯 존경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마치 그가 몽크 마스터님을 대하는 것 같다고 프리엄이 생각했을 정도다.
말하는 일은 앨러너데일의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헤오샤가 직접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이것저것 필요 없고, 공연히 피 튀기는 행사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야. 비록 국왕께서 베푸시는 위문잔치라지만 병사들은 평소에 하는 일이 전투고, 보는 게 마족이야. 사람끼리 싸우든 동물이나 마족을 붙잡아두고 싸우든 별로 재미있지 않다고. 그렇지만 국왕께서 베푸시는 행사를 취소할 수 없으니 살벌한 전투가 아닌 다른 것으로 병사들을 즐겁게 해주었으면 하는 게 라민 장군님 생각이야. 뭐 서커스나 연극이나 그런 것 있잖아. 좋은 생각이 없으면 여기 앨러너데일도 도와줄 거야. 명색이 시인이고 문장가니까 연극 대본 정도는 쓸 수 있겠지.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다시 수도를 떠나 변경으로 갈 병사들을 재미있게 해주면 돼. 단 실제 전투 없이 말이야. 그런 것은 수도의 시민들에게나 보여주도록 해.”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민 장군님과 헤오샤 장군님의 뜻을 알아 모시겠습니다.”
“뭐 내 생각은 아니야. 라민 장군님 생각이지.” 그냥 묻어가도 될 텐데 헤오샤는 굳이 이 의견이 라민 장군의 것이며 라민 장군이 얼마나 병사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지휘관인지 강조하는 태도를 보였다.
프리엄은 헤오샤와 앨러너데일을 상대로 조금 더 대화를 나누고 그들을 정중하게 전송했다. 그리고 그가 다시 혼자되었나 싶을 때 몽크 마스터 올파스 그림이 소리 없이 다시 방에 나타났다. 그리고 프리엄에게 말했다. “나갈 준비를 하게.” 프리엄은 어디 가는지 따위는 묻지도 않고 옷장에서 긴 로브를 꺼내 걸치면서 말했다. “밖이 소란스러운 것을 보니 무르밀로 마스터가 성을 내며 이리로 오겠군요.” 프리엄이 로브를 입고 두건을 내리자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며,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런 모습의 프리엄에게 몽크 마스터가 말했다.
“자기 무리를 다 데리고 올까?”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르밀로 마스터가 움직일 수 있는 검투사는 20명정도 입니다.”
“하긴 그렇게 한다면 펠릭시아는 생각보다 멍청한 여자일 테지. 그건 그렇고 현재 우리가 보유한 검투사의 수가 얼마지?”
“512명입니다. 투기장 전체로는 천 명이 조금 넘습니다. 무르밀로 마스터 같은 검투 관련 마스터를 개인적으로 따르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마스터께서 명령을 내리시면 마스터의 뜻을 따를 사람들입니다.”
“그렇기는 하겠지만, 돈이나 계약으로 묶여서 그러는 자들은 깊이 신뢰하지 않는 편이 좋다. 최근에 두각을 보인다던 그 격투가는 어떻게 되었나?”
“실력이 뛰어나서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계약으로 더 단단히 묶어둘 생각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어지간한 마스터들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하다고 봅니다.”
“헤오샤와 앨러너데일이 다녀간 모양이던데 별일 없었나?”
“별일 없었습니다.”
“오늘은 어쩔 수 없었지만, 왕국군의 핵심인물들이 투기장에 자주 드나드는 것은 좋지 않아. 헤오샤는 무예만 높을 뿐 상황을 파악하는 능력은 떨어지는 장군이니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라민 장군이라면 문제는 다르지. 감이 좋은 장군이라면 뭔가 문제의식을 느낄 테고, 그러면 문제가 커질 수 있어. 다시 말해서 라민이든 누구든 통제를 받지 않는 1천 명의 잘 단련된 무장병력이 합법적으로 투기장에 상시 거주하고 있다는 발상을 해내선 안 돼. 그러니까 검투사들의 숙소를 방문하겠다고 하면 무슨 구실을 대서라도 허락해서는 안 돼. 정 힘들면 무르밀로 마스터나 그쪽 사람들에게 안내하라고. 우리 측 검투사들이 규율과 소속감을 지닌 무장병력이란 사실은 드러나선 안 돼. 그러느니 싸움꾼이 떼로 모인 패거리 정도로 생각해 주는 편이 낫지.”
“그들은 다 편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검투사가 상시 대기 중인 무장병력이라는 관념을 떠올리지 못할 겁니다. 설령 그런 생각을 떠올려도 투기장의 마스터들이 왕실에 충성하니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검투사들이 문제를 일으켜도 수도에 주둔중인 왕국군이 훨씬 많다고 생각할 테니 걱정하지 않을 겁니다. 왕실경비대와 삼중성벽의 주둔군 병력은 객관적으로 투기장 검투사들보다 숫자도 많고 훨씬 강하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것은 사실이지. 하지만 우리 검투사들이 수도 적고 그들보다 전투력도 떨어져도 파악되지 않은 병력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어둠에 숨은 병력은 때로 실제 이상의 힘을 발휘하는 법이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투기장을 암중에서 장악하신 마스터님의 계획은 정말 탁월했습니다. 수도에 합법적인 병력을 보유할 편법을 지니면서 동시에 투기장 운영에서 오는 자금 덕분에 돈 문제까지 해결되는 셈이니까요. 다시 생각해도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 그런 점에 비하면 나를 드러내지 않고 투기장에 관련된 마스터들을 다독이고 관리해야 하는 문제는 사소한 대가에 불과하지.”
“네 맞습니다. 그건 그렇고 펠릭시아가 와서 되지도 않는 불평을 터뜨리기 전에 오세아니드를 만나러 가시죠. 전에 저 혼자 갔을 때는 제 딴에는 해적이라고 얼마나 위세를 떨며 겁을 주어서 협상을 유리하게 하려 드는지 혼났습니다.”
“무예실력은 없어도 투기장에서 매일 보는 것이 검투사라 폭력적인 협박에는 눈도 꿈쩍하지 않는 게 자네 아니었나? 그렇게 말하니 이상하군.”
“우스워서 혼났다는 말이죠. 그러니 오늘은 동행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저쪽의 폭압적인 자세에 이쪽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마스터께서 나서서 위엄을 보이시면 그 해적이 그때도 당당하게 협상에 임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혹시라도 겁먹어주면 협상이 유리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오늘은 그럴 생각으로 여기 자네를 보러 온 것이니 어서 같이 나가세. 아까 말대로 펠릭시아 오기 전에 말이지. 그런데 이미 늦은 것 같군.”
“네?”
“방문 앞에 지금 막 누가 도착한 기척이 있어.”
“펠릭시아가 벌써 왔을 리가 없는데요. 아직은 죽은 제자를 붙들고 있을 텐데…”
그 말과 함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응대도 하지 않았는데 한 청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당당한 기세로 문을 열고 들어온 청년은 몽크 마스터와 프리엄을 보더니 말했다. “이런, 손님이 계셨군요. 실례했습니다. 하지만 앨러너데일이 뭔가 빠뜨린 것이 있어서 급히 오다 보니 사전에 통보도 드리지 않고, 다른 손님이 계실지도 모르는데 무작정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본래 군인이란 예고 없이 원하는 장소에 상대가 뜻하지 않은 시간에 나타나는 것을 목표로 사는 사람이니 너그럽게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제가 두 분을 적으로 여긴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 제 소개도 안 했군요. 저는…”
몽크 마스터 올파스 그림이 앞으로 나서며 인사하며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라민 장군이시죠. 장차 왕국군의 최고 지휘관인 대장군이 되실 분이라는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뵈니 영광입니다. 저는 몽크들의 마스터 직을 맡고 있는 올파스 그림입니다. 아, 손님이 주인을 두고 먼저 인사를 하는 결례를 범했습니다. 이미 아시고 오셨겠지만, 이 분은 이 방의 주인이시고 이곳 투기장의 운영자이신 프리엄님이십니다. 여신의 열렬한 신도로서 저희 교단을 크게 후원해주고 계시기에 제가 가끔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프리엄이 인사를 마쳤을 때 라민 장군이 말했다. “차림새를 보니 막 외출하려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프리엄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나 봅니다. 그렇게 얼굴도 안 보이게 차려입으신 걸 보니 별로 추운 날씨도 아닌데 말입니다.”
프리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몽크 마스터님 같이 수련으로 단련된 분이나 장군님처럼 험한 군생활을 겪으신 분들과 달리 저는 신체를 단련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하하. 그나저나 왕국의 장군께서 오셨는데 저희가 시간이 없어서 나중에 다시 만나 뵈어야 하겠습니다.”
“어쩔 수 없지요. 예고도 없이 찾아온 제 잘못입니다. 다만 제 부하들이 다음 주에 이 시설에 모여 공연을 본다고 하니 사전답사라고나 할까요… 한 번 투기장 곳곳을 둘러보고 싶은데 그래도 별문제 없겠죠?”
프리엄과 올파스 그림은 둘 다 잠시 답을 못하고 망설였다. 딱히 안 된다는 핑계를 대기 어려웠는데 상대가 하려는 일은 두 사람이 가장 꺼리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상대인 라민 장군은 왕실경비대의 대장 겸 왕실기사단 부단장이었다. 이 두 직책을 겸직한 일은 천 년 왕국 역사에 오직 아홉 명밖에 없었고, 그 아홉 명은 예외 없이 훗날 대장군에 올랐다. 왕실기사단장은 왕국군 전체의 총사령관인 대장군이 자동으로 겸직하는 자리다.
궁성을 책임지는 왕실경비대 대장은 전임자인 소드맨 마스터 라슈아 상장군이 물러나면서 강력하게 추천하여 라민을 앉혔다고 한다. 아직은 직책에 맞는 상장군으로 진급은 안 했지만, 둘 중 어느 직책을 내세울지라도, 딱히 별다른 이유 없이도 수도 내의 시설인 투기장을 보겠다고 한다면 막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상대에게는 지휘 책임을 맡은 부하들이 올 곳을 사전에 시찰한다는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 있었다.
차선책은 프리엄이 시설을 직접 안내하는 것인데 하이레이번의 부하인 오세아니드와 약속이 코앞에 걸려 있었다. 시간이 지체되면 오세아니드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투기장 안을 돌아다니다가 라민 장군의 눈에 띄지 말란 법도 없었다. 라민 장군이 오세아니드의 얼굴은 모르고 그도 겉옷은 걸쳤겠지만, 팔뚝만 걷어 뱀 문신만 확인해도 상대방이 누군지 라민 장군이 모를 리가 없었다. 라민 장군이 지상군 지휘관이라지만 왕국 해군의 골칫거리인 하이레이번의 유명한 부하 해적의 특징 정도는 들어서 알고 있다고 봐야 했다. 아니 꼭 군부에 있지 않더라도 이런 일에 관심이 있다면 알만한 사람은 아는 특징이다.
프리엄과 올파스 두 사람은 이 상황을 해결할 묘수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라민 장군의 뒤쪽으로 두 사람이 더 나타났다. “그것 보라고. 내가 이리로 오셨을 거라고 했잖아.” 그 말을 하며 나타난 사람은 아까 나타났던 앨러너데일이었고, 그 옆에 따라온 여자는 역시 헤오샤 장군이었다.
혼자만 오면 어쩌냐? 이왕 온 김에 같이 투기장을 돌아보자 그런 말이 오가는 동안에도 올파스와 프리엄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 결국 무르밀로 마스터 펠릭시아가 나타났다. 펠릭시아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이 있자, 애초에 여기에 온 목적을 꺼낼 수 없었다.
투기장 관련자가 아닌 외부인들 앞에서 갑자기 대진표를 바꾼 프리엄과 아무리 투기장에서 적수로 만났기로서니 상대를 그냥 죽여버린 몽크 마스터에게 지닌 불만을 표출하기 어려웠다. 따지고 보면 투기장에서 대진표가 바뀌거나 사람이 죽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투기장 관련자들끼리 있을 때는 아끼는 사람이 죽었으니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는 일 정도는 할 수 있지만, 투기장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서로 간에 인사가 오간 다음에 펠릭시아는 처음 만난 헤오샤 장군에게 시선을 줄 수밖에 없었다. 왕국군 제일의 무예를 지녔다는 소문을 지닌 헤오샤이니 그 소문은 자연히 여자 가운데 최강자는 헤오샤라는 평판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비록 상대가 왕국군의 장군이니 가서 따지는 사람은 없었지만, 여성 마스터로서 정말 이 여자가 나보다 명성이 뛰어나도 될만한 사람인지 알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펠타스타 마스터 마리아 리드는 헤오샤 장군보다 오래전에 명성을 얻었으니 별로 헤오샤를 의식하지 않는 것 같고, 드라군 마스터인 발레스카 히밀이나 펜서 마스터인 소르샤 허턴은 원래 명망 높은 귀족 가문 출신이니 뭘 해보고 싶어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노비 마스터인 유라 스와요네는 왕실의 그림자이니 양지로 나와서 호승심을 발휘하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는 무르밀로 마스터 역시 헤오샤가 장군복을 벗고 투기장에라도 서지 않는 한, 궁금증을 풀 길은 없다.
물론 궁금증을 풀 방법이 없는 것은 마스터 상호 간에도 마찬가지다. 거의 천 년 전 타니엘 2세 시대에 이미 마스터 사이에 무익한 호승심에 의한 상호대결을 금지한 왕국법이 반포되었으므로, 특별한 사유 없이 누가 더 나은가를 이유로는 싸울 수 없었고, 그 이후로 이 왕국법 때문에 마스터 간에 생사를 건 싸움은 무척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루클리스와 리디아 샤펜의 경우라든가 하는 예외는 적지 않았지만, 오직 대결만을 목적으로 마스터 간의 전투가 벌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이 벌어졌을 때 왕국 법정에서 뚜렷한 사유를 증명하지 못하면 해당자는 마스터에서 죄수로 순식간에 신분전환이 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펠릭시아가 등장하여 인사를 나누고 라민 장군이 여기 온 목적을 다시 밝히자 결론은 자연스럽게 투기장의 마스터이자 지분소유주이기도 한 펠릭시아가 투기장 이곳저곳을 안내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예의 바른 인사를 나누고 펠릭시아가 라민 장군 일행을 이끌고 사라지자 프리엄이 몽크 마스터에게 말했다. “우리측 검투사들에게 급히 말을 전달하겠습니다. 라민 장군이라도 특별히 탐지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펠릭시아의 성격을 고려하면 투기장 전역을 다 보여주며 다니지도 않을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라민의 갑작스러운 방문은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문제가 되진 않겠지. 설령 아니라 해도 일단은 오세아니드를 만난 다음에 의논해보세.”
그렇게 말하고 두 사람 역시 프리엄의 방을 떠났다. 모두가 떠난 프리엄의 방이 어둠과 고요가 찾아왔다.
그 때는 아무도 몰랐지만, 이 날의 일은 왕국 수도에서 투기장이 폐장되고, 프리엄이 재판에 회부되는 엄청난 사건의 시작이었다.
왕국 문헌 1
2017.06.29 오후 3:53:27
* 왕국문헌 보관소 공식기록 제1096-562호 문서 상편
: 폴라니 영지의 전투에 관한 건
다음의 기록은 각기 마스터 그에라와 마스터 워시스 크리크가 이끄는 용병단인 칼날서약단과 황금노래단이 폴라니 영지에서 벌인 전투에 관한 내용이다. 불행히도 이 기록은 이후 이 전투의 종전에 라민 장군이 관련됨으로써 군무대신과 의전대신 등 조정의 여러 고관들에 의해 기밀로 분류되었다. 불행 중 다행인 일은 이 전투의 첫 전투와 그 내용은 그 과정을 목격하거나 겪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되고 외부에 널리 알려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왕국 기록관들 역시 뜻을 모아 이 초전은 기밀문서로 지정하지 않도록 상부에 청원하였으며, 그 결과 아래의 기록은 공개가 허용되었기에 이렇게 기록하는 바이다.
왕국력 1096년(타히엘 국왕 재위 11년) 1월 왕국 수석 기록관 에센 요나스
그에라는 펜을 놓고 탁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그와 같이 탁자의 지도를 내려다보고 있던 부하 사관 세 명을 차례로 보았다. 그에라는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두 명의 사관과 한 명의 총사관이 더 있었는데 그 세 사람은 모두 이 자리에 없다.
병력도 그 때에 비하면 많이 줄어서 150명대가 되었다. 여러 면에서 하이레이번의 해적단과 조우하여 전멸한 일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뼈아픈 일이었다.
그나마 참호 파기 공사에 고용주측 영지민들을 동원할 수 없었다면, 큰일 날 뻔하였다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사관 중 하나가 말을 걸었다.
“황금노래단이 도착하기 전에 참호공사를 끝낼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에라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한 일이지만, 기본적인 일을 해둔 덕분에 한 가지 다행스러운 일이 되긴 했지. 그 점은 다행이지만, 애초에 상대 영주를 붙잡아 조기에 분쟁을 종식시키는 일은 완전히 틀어진 것 같군. 게다가 그쪽이 고용한 게 하필이면 워시스라니 이 계약건 너무 쉽게 생각하고 덤벼든 거 같아.”
“차라리 이곳에 오자마자 상대 영주를 사로잡으러 진격할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랬으면 전투는 쉽게 끝났겠지만, 영지병들이 적지 않게 다쳤을 거야. 행여 사망자가 나올 수도 있는 일이고, 설령 사망자 없이 진압했다가 하더라도 혹시 영주가 그냥 도망가는데 성공하면 결과적으로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셈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서로 용병단을 보유한 상태가 되어 도망은 가지 않기로 서약했으니 지금부터 잘해야지.”
“그렇게 본다면 그나마 본성을 미리 점령하고 있는 점은 다행입니다. 또 이 경우에는 보급이 끊길 염려도 전혀 없고 말입니다.”
“그건 워시스쪽도 마찬가지야. 영지민들을 해치는 일은 우리나 저쪽이나 계약조건과 의전대신의 훈령 양쪽에서 엄격히 금하고 있으니까. 따라서 우리나 저들이나 모두 상대의 보급을 막을 방법이 없어. 물품을 생산해서 운반하는 일은 영지민들이 맡고 있으니까, 군인은 순수하게 전투로 승부를 볼 수 밖에 없는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환경이지. 그렇지만 폴라니 영지의 본성을 타고 앉은 것은 절대로 지지 않을 조건은 확보한 것이면서 동시에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이 된 셈이지.”
“그나마 본성 성채를 확보하지 못했다면 황금노래단 녀석들은 기동력과 원거리 사격이 우리보다 나으니 더 고생했을 겁니다. 파놓은 참호 덕분에 황금노래단이 기동력을 활용해 의뢰주를 공격하는 길도 일단 막혔고, 이 정도면 일단은 상황은 비등한 형세라고 하겠습니다.”
“참호가 없는 지역으로 우회 기동할 가능성은 없을까?”
“이론상은 가능하지만, 영지민들에게 경제적인 피해를 줄 겁니다. 기동 중에 우연히 거기를 지나던 영지민이 한 명이라도 그저 조금이라도 다친다면 이 전투는 거기서 끝입니다. 이 전투는 순수한 용병단들만의 전투가 되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그 점을 위반할 가능성이 있는 작전은 위험합니다. 워시스 크리크라면 더욱더 영지민들에게 피해가 갈 작전을 세우지 않을 겁니다.”
다른 부하가 단장을 비롯한 모두에게 확인하는 어조로 말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대상은 용병 상호간과 소속 영주와 그 직속 경비병뿐이고, 그나마도 영주와 경비병들은 부상자는 나와도 사망자는 절대 나와서는 안 된다고 정해져 있으며, 그건 우리나 저들이나 마찬가지다. 애초에 양측 영주들은 자기 경비병들이 모두 두들겨 맞고, 상대방 용병단이 집무실에 들어갈 정도면 항복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상대측 용병단을 넘어서 거기까지 갈 거냐 하는 점만 남는다.”
그에라가 그러한 부하의 정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아. 모두 알고 있는 상황은 그 정도로 정리하고, 새로운 소식은 없나?”
“여러 번 반복해서 추산한 결과에 따르면, 워시스의 총병력은 120명대입니다. 즉 우리가 30명 정도 많습니다.”
“급하게 오느라 대포라든가 다른 특별한 무기는 챙겨 오지 못했다고 보여집니다. 평소 워시스의 성향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지만 늦게 도착했다면 전투는 시작도 못 했을 테니 장비를 최대한 줄이고 급히 이동해 온 일은 이해하지 못할 일이 아닙니다. 뭐 아무튼 우리에겐 다행한 일입니다. 컴패니언, 석궁, 총기류의 장비는 원래 황금노래단을 상대하면 기본으로 겪을 일이라 그건 잘 아실 테니 구태여 현재 무장 상태를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컴패니언을 탑승하여 이동하느라 꽤 지쳐있을 테니 당장 우리를 공격하는 일은 무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관 중 하나가 질문했다. “여정으로 지쳐있고, 정리가 아직 안 되어있을 때 한 번 건드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싶은…”
그에라가 부하의 의견을 제지했다. “다른 용병단이라면 몰라도 상대는 워시스다. 자기 부대가 지쳐있다는 점을 알 테니 더 경계할 녀석이야. 그리고 병력을 나눠서 소규모 습격으로 간을 보려다가 워시스의 무용에 휘말리기라도 하면 사망자만 나올 것이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전병력을 움직일 수도 없다. 그러니까 소규모 습격은 한 두 사람의 실력자가 활약해도 기습의 효과 따위는 무효화할 수 있는데 누구나 알다시피 워시스가 그런 사람이지. 그리고 기습이 성공하지 못하면 기동력에서 슈바르츠라이터들에게 뒤지는 기습조는 후퇴도 어려울지 몰라.”
다른 부하 사관이 말했다. “그래도 아무튼 계약기간도 있으니 이대로 죽은 영주의 본성을 차지한 채 현상유지 작전을 쓸 수는 없습니다.”
또 다른 사관이 그 말을 받았다. “뭐 그렇기는 하지만, 워시스 마스터측도 자기 고용주나 우리 고용주의 양측의 영주 처소를 제외한 양측 고용주 영지에서 싸우기는 곤란하겠지. 거기에 세 영지 어디의 영지민에게도 피해를 줘선 안 되니 아무래도 싸움은 우리가 차지한 이 본성과 그 주변으로 한정될 수밖에 없고, 그건 성을 차지한 우리가 유리하다는 뜻이지.”
세 번째 사관도 나름대로 견해를 말했다. “결국 어느 한 용병단이 더 이상 피해나 손해를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한 후 물러나거나, 기발한 작전으로 경계를 따돌리고 상대방 고용주를 생포하면 끝나는 일인데 후자는 분쟁에 직접 관련된 세 영지 외에는 출입을 금지당해서 우회수단이 거의 없으니 어지간한 작전으로는 다 틀린 일이라 봐야겠지.”
그 때 경보를 알리는 타종 소리가 울렸다. 그에라는 갑작스런 경보에 놀라기는커녕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뭐야 짐도 풀기 전에 기습을 한 번 해보겠다는 건가? 뭐 나름대로 워시스 다운 선택인 건가..”
세 명의 사관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에라는 그들을 인솔해서 조금도 서둘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폴 프엥크 부단장이 이끄는 36명의 용병단원이 칼날서약 단원들이 웅크리고 있는 참호를 향해 달렸다. 참호 속 적군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하리란 점은 잘 알지만, 적이 머리를 들어 자신들을 관측하지 못하도록 사격을 그치지 않았다. 황금노래단에 비하면 원거리 공격력이 취약한 칼날서약단 처지에서 참호를 구축해 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컴패니언이 달려오는 소리가 작지 않아서 참호에 숨은 칼날서약단원들은 상대가 금방 도착하리란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그 순간이 오면 지니고 있는 큰 칼로 매운 맛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황금노래단 용병들이 접근하며 내는 소리에 집중하였다.
참호라지만 전체가 연결되도록 땅을 판 것은 아니었다. 영지민들을 다수 동원했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대공사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시간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가로로 길게 판 참호들은 적정거리를 두고 긴 웅덩이처럼 배치되었고, 슈바르츠라이터들은 연결되지 않은 사이사이를 달려서 통과할 수는 있지만, 좌우에서 튀어나와 공격하는 칼날서약단에 방해를 받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칼날서약단원들은 상대가 이 참호선을 돌파하는 일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어차피 전원 통과를 막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고용주측 영주를 호위하고 있는 영지병을 압도할 수 있는 수의 황금노래단원이 통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몇몇 칼날서약단원들이 적이 접근해오는 소리를 가늠하여 바로 참호 앞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자 칼을 휘두르면 일어섰다. “멍청이들 앉아!” 막 성채에서 나오던 그에라와 사관들이 그 모습을 보고 들릴지 안 들릴지 생각하지 않고 바로 내지른 말이었다. 그러나 몸을 일으킨 칼날서약단원들은 그 소리를 듣지도 못했고 반응할 틈도 없었다. 37명의 황금노래단이 사전에 작정한대로 카라콜을 사용하며 뒤로 빠져나갔다. 몇몇 칼날서약단원이 그 총격에 피해를 입었으나 노련한 단원들은 정말로 적이 참호에 돌입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조금 전에 일어서서 피해를 자초한 신참들에게 윽박을 지르는 단원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훈련을 받고 사전에 교육을 받아도 처음 전장에 서면 실수하기 마련이니 크게 꾸짖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 첫 실수에 죽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었고, 살아남았다면 말로만 듣던 교육을 몸으로 체험했으니 나아질 터였다. 만약 그러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고 죽어야 끝날 일이었다.
아무튼 황금노래단도 이런 가벼운 총질만 하고 물러갈 생각이면 아예 오질 않았을 테니 결국은 참호에 뛰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어차피 고용주의 영지로 넘어가는 가장 좋은 통로이자 계약 조건과 여러 정황을 고려해 유일한 통로이니 이곳을 돌파하는 시도를 대충하고 물러가기 어려운 두 번째 이유다.
한 가지 걱정이라면 지금 돌격중인 황금노래단 일부나 혹은 전부가 참호를 무시하고 계속 칼날서약단 고용주측의 처소로 달려가는 계획을 지녔을 경우다. 그러나 전부가 무시하고 달려가는 계획은 그에라 처지에서는 그래 주면 좋다고 생각할만한 일이었다. 컴패니언의 기동력을 이용한다고 하여도 고용주의 직속 영지병이 그들의 영주 앞을 막아서는 상황은 어쩔 수 없다. 용병단의 실력이 더 뛰어나니 시간만 주면 다 제압할 수 있겠지만, 그 전에 뒤를 쫓아온 칼날서약단을 맞아 양면으로 포위되는 상황이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결과는 전멸밖에 없다. 그렇다면 일부는 참호 안으로 뛰어들어 참호에 있던 칼날서약단원들이 따라오는 것을 방비해야 한다. 그들이 아니더라도 성채에 있는 본대가 그에라의 지휘 아래 따라올 것이 틀림없다. 뭐 그래도 아무튼 이왕 돌격한 이상 전부는 아니더라도 참호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다.
아니나 다를까 프엥크 부단장의 병력이 집중포화를 퍼부으며 참호 안으로 들어왔다. 지원군도 파견하지 않은 채 지켜보던 그에라가 그 모습을 보면서 말했다.
“일단 그냥 돌파할 생각은 아니었다는 건가? 그래 그게 힘들다는 정도는 크리크도 알겠지. 하지만 참호를 점령해도 그 참호를 내려보고 있는 성채는 우리가 지니고 있으니 참호 확보는 의미가 없을 텐데…”
상관인 단장이 그런 말을 하는 가운데 참호에 있던 칼날서약단원들은 사이클론을 돌면서 적을 공격했다. 이후 각자의 기술인 와일드샷과 레델이 각기 상대에게 발휘되며 두 용병단 사이에 교환되었고, 그렇게 참호 안은 총성과 고함 그리고 피를 부르는 칼날이 오고 가는 장소가 되었다.
사관 하나가 그에라에게 말했다.
“지원을 지금 투입할까요?”
“좁은 참호 속 난전에 병력을 많이 구겨 넣어 봐야 효과가 없다. 그러니 지금은 아니다. 잠깐만 더 기다려 투입하되 기력을 소모한 아군과 교체되도록 훈련한대로 실행하라.”
그에라의 명령을 사관이 실행하고 있을 때 크리크의 황금노래용병단도 상대의 병력이 교체되는 그 실낱같은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들도 분명히 이런 교체로 지치지 않은 신선한 병력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고, 그 경우 그대로 있으면 전멸밖에 없다는 점을 잘 알았다. 그래서 이 교체의 미묘한 순간을 노려 참호 밖으로 탈출할 수 있는 자들만을 가려 뽑아 왔다.
죽거나 다친 단원을 제외하고 열 명 정도의 황금노래단원이 참호를 벗어났다. 죽거나 다쳐서 못나온 단원도 있었지만, 처음부터 이 누가 참호에 남고 누가 나올지 결정하고 온 까닭도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주인이 다루지 않아도 천천히 움직여 참호 주위를 돌아온 컴패니언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참호를 벗어난 부단장과 황금노래용병단원들이 컴패니언에 탐승하면서 후퇴사격으로 이제 후방이 된 참호방향을 견제했다.
그들을 추격하려고 참호에서 뛰쳐나오던 칼날서약단원 몇이 그 서슬에 물러서거나 혹은 그 공격을 맞았다.
일단 거리가 벌어지자 상대측 영주와 달리고 있는 황금노래단원 사이에는 영주의 경비대만이 유일한 병력이었다. 그렇다면 그에라가 영주의 호위로 얼마나 많은 칼날서약단원들을 붙여놓았는가 라는 문제만 남는다.
단련되고 노련한 용병단원이 아니라면 시도할 수도 없는 작전이었다. 참호전 같은 아수라장에서 근접전 전문도 아닌 황금노래용병단이 백병전에 가까운 전투 상황에서 정해놓은 순간을 노려 전장을 이탈하는 일은 이론상으로나 가능한 일이다. 병력을 이렇게 쓰면 참호전에 휘말려 애초에 의도 따위는 날라가고 누가 죽고 누가 살아 남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기 쉽다. 그럼에도 이렇게 한 것은 참호 속의 난전을 유도하지 않고 바로 병력을 나누어 일부는 참호로 뛰어들고 일부는 그대로 달렸다면, 지금과는 달리 상대의 추격을 피할 수 없고, 또한 빨랐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황금노래단의 의도대로 참호를 벗어나 추적에 나선 칼날서약단은 정말 소수였고, 그나마 후퇴사격에 추적을 포기하고 칼날을 돌려 참호에 남은 황금노래단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본진의 그에라는 한 박자 늦었지만 병력을 출동시켰다. 참호 쪽은 방금 교체 병력이 들어갔으니 시간이 지나면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것이다. 교대하여 나온 병력은 부상병과 사망자가 있지만 쉬다가 다시 교대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그쪽은 문제가 없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크리크의 황금노래단이 추가 병력을 보내 참호의 자기 아군을 지원하는 일인데 그에라의 병력이 많고, 여기는 그에라가 장악한 지역이라 크리크측이 출발한 것을 보고 반응해도 전혀 늦지 않았다. 따라서 완전히 병력을 빼서 성채와 참호를 무방비로 놓지만 않으면 걱정할 것 없이 남은 병력을 동원해 참호지역을 돌파한 열 댓의 황금노래단을 추격할 수 있었다.
그에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최소한의 인원을 남기고 전원 출동을 명했다. 참호에 남은 황금노래단과 저쪽 부단장 프엥크가 이끈 열 댓을 모두 죽이거나 포로로 잡는다면 승부의 추는 기울게 되고, 그러면 그 이후에는 소모전이나 장기전으로 가도 필승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편 황금노래단 부단장 프엥크와 부하들은 칼날서약단의 방어선인 참호를 돌파하자 죽어라 그에라의 고용주 처소를 향해 달렸다. 하지만 너무 속도를 내다가 보행 중이거나 작업 중인 영지민을 들이받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기수로서의 실력을 최대로 발휘해야만 했다.
물론 기수로서 그런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만을 엄선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반 영지민들을 피하면서도 그리 속도를 크게 잃지 않고 달려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뒤를 그에라가 직접 이끄는 본대가 추격에 나섰다. 프엥크와 황금노래단 부하들이 아무리 빨라도 결국은 영주의 직속 경비병들과 마주친 후 그들이 제압당하기 전에는 무조건 도달할 수 있다고 예상되었기에 그에라는 적을 확실하게 잡기 위해서 본대가 진군할수록 산개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넓게 펼쳐진 좌우익이 그에라의 본대가 적을 상대하는 동안 프엥크의 타격대가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거나 달아나는데 방해가 될 지점을 선점하도록 하는 조치를 담은 명령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
그에라(Guerra), 도펠죌트너 마스터.
도펠죌트너 마스터이자 칼날서약 용병단의 단장. 전투 감각에서 영리함과 총명함을 발휘하며, 용병으로서의 많은 명성과 금전적인 이득을 원한다.
계약을 중요시하며, 지금까지 가장 큰 고객은 왕국군과 몇몇 지방 영주들이다. 부하 용병을 아끼는 타입이라기보다는 ‘나 같은 리더를 만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돈도 버니 너희에게도 좋은 거다’라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물론 그렇기에 유능한 부하에게는 관심을 많이 쏟지만, 비록 그가 의식하든 못하든 이것은 애정보다는 투자에 가깝다.
왕국 문헌 2
2017.07.03 오후 2:05:56
* 왕국문헌 보관소 공식기록 제1096-562호 문서 하편
: 폴라니 영지의 전투에 관한 건
그에라의 본대 추격대가 그런 명령에 따라 본격적인 움직임을 펼칠 때, 워시스 크리크는 준비하고 있던 2차 부대를 출진시켰다.
성채에 남아 경비하던 그에라의 부하 용병들은 그 출진을 보았고, 즉시 참호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그에라에게 본대를 불러들이는 신호를 보내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2차 공격대의 규모가 대단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정도 숫자까지는 성채라는 장점을 타고 앉은 수비측이 몇 배의 병력이 와도 문제가 없었고, 참호 쪽 역시 전황도 유리하고 거의 2개 조로 나뉘어 적을 번갈아 공격하는 상황이라 그쪽으로 간다 하여도 큰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공격에 나선 황금노래단의 목표는 악전고투 속에 말라 죽어가고 있는 참호의 황금노래단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성채를 노리고 곧장 달려왔다. 그리고 쇠뇌와 총의 사정거리에 들자마자 마구 집중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슈바르츠라이터의 집중포화의 명성을 들어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 하다 싶을 정도였다. 칼날서약단도 농성전을 대비해 투사무기 등을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황금노래단은 성채를 노리고 공격하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컴패니언에 탄 채 빠른 이동과 집중포화 회피기동, 그 밖의 기술들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총탄과 화살을 쏟아붓는 것에만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결국, 성채를 수비하던 칼날서약단은 상대를 공격하려는 생각을 접고, 성벽 뒤로 숨는 전술을 택했다. 황금노래단은 성벽에 일정 거리 이상 근접하지 않으니 굳이 공격할 필요가 없었고, 컴패니언에 탑승한 채 끊임없이 움직이니 칼날서약단이 공격해봐야 효율도 낮았기 때문이었다.
공격의 효율이 낮은 것은 황금노래단도 마찬가지였다. 칼날서약단 수비병들이 성을 방패 삼아 몸을 숨기고 있으니 아무리 여름날 쏟아지는 우박처럼 사격을 가해도 손가락 하나 다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에도 황금노래단의 2차 공격대는 성채를 향해 계속 쉬지 않고 사격을 퍼부었다.
성채 수비를 맡아 남은 그에라의 세 명의 사관 중 하나가 생각하기에 이 상황은 1차적으로는 자신들에게 하나도 불리할 것이 없었다. 황금노래단은 공연히 어마어마한 물자를 쓸데없는 총질과 활질에 낭비하고 있었고, 자신들은 고개를 내밀지 않고 머리만 숙이고 있으면 그 낭비는 그대로 적들에게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 틀림없었다. 저 정도의 병력이라면 전 단원이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상황을 몰라서 바로 코앞에 적이 들이닥쳐서야 그 사실을 알아도 퇴치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자 오히려 등골이 서늘해졌다. 전장에서 닳고 닳은 용병단장인 워시스 크리크가 이렇게 척 봐도 답이 나오는 손해를 자초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보려 했는데 그러자 더 격렬한 사격이 쏟아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했음에도 그는 상대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성채를 노리거나 성을 수비하는 병력을 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냥 무조건 수비병 부근을 쏴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고, 그렇게 해서 높은 곳에 있는 성채 수비병들이 관측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왜 그런 거지?’
그 마음속 질문에 대한 답은 금방 떠올랐다. ‘황금노래단 전체가 출동할 생각인데 충분히 전진할 때까지는 우리가 모르기 바라기 때문이다. 그에라 단장님의 본대가 돌아올 적기를 놓치게 하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는 참호에 있던 칼날서약단 역시 황금노래단의 3차 병력이 출발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들은 성채에 있는 동료들 같은 지리적 이점이 없었다. 그래서 세로로 길게 뱀 모양 진형을 이루어 늘어선 황금노래단 병력이 많은지 적은지 알 수 없었다. 이런 진형을 취하고 달려오니 비슷한 고도의 지형에 서서는 정면에 보이는 적병의 후미에 얼마나 많은 적이 뒤따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컴패니언 무리가 일으키는 먼지구름 정도였다.
따라서 워시스 크리크의 신호에 따라 황금노래단이 횡으로 길게 진형을 펼쳤을 때야 황금노래단이 전원 출동했음을 알 수 있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그들이 성채에 사격을 하고 있는 황금노래단 2차 공격대를 습격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는 참호 안의 적을 곧 전멸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쪽을 마무리하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칼날서약단의 참호전투가 생각보다 시간이 더 들고 있는 이유는 컴패니언 탓이었다. 황금노래단은 단원마다 컴패니언을 타고 왔고, 그들도 전투에 참여하였다. 개체로는 칼날서약단원 한 사람 한 사람에 못 미쳤지만, 황금노래단은 그들이 원래 각자의 컴패니언을 얼마나 아끼는지 모른다는 평판은 어디다 집어 던졌는지 컴패니언을 주저 없이 희생하면서 방패막이로 사용하였다.
그래 봐야 시간 연장책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이 시점에서 황금노래단원은 상당수가 살아남았다. 물론 컴패니언은 한 마리도 살아남지 못했다. 컴패니언 하나를 이 수준까지 훈련시키고 키우는 비용을 생각하면 황금노래단에 엄청난 손실을 끼친 것은 분명하고, 그 손실이 단순히 시간 연장책에 지나지 않는다면 도저히 전투의 손익 계산이 맞지 않는 일이지만, 바로 그 정확한 시점에 이제는 황금노래단의 컴패니언이 아니라 황금노래단원의 인명이 희생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바로 그 시점에 황금노래단의 남은 본대 전원이 참호에 쇄도하였다. 돌격사격으로 문을 연 황금노래단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에라는 좁은 참호에 지원병을 더 넣는 일이 효율적이지 않다고 하였지만, 황금노래단은 근접전이 아니라 사격전이 전문이었다. 층층이 진형과 원형 포진을 한 황금노래단원들이 각자 자기가 선 원형진에서 전우들과 줄을 맞춘 뒤, 참호 안의 아군과 참호를 둘러싼 앞열의 아군을 피해서 적에게 총과 화살을 선물했다. 앞열과 후방열의 황금노래단이 컴패니언의 자세를 낮추기도 하고 내리기도 하고, 몸을 비스듬히 기울여 다리 힘만으로 컴패니언에 매달리기도 하고, 온갖 방법과 온갖 각도를 사용해 아군을 피해 참호와 그 부근의 칼날서약단원에게 부지런히 사격을 퍼부었다.
이 순간 워시스 크리크는 소수가 다수의 병력을 이기는 일은 없다. 그렇게 보이는 모든 사례는 실제로는 전장의 일부 지역에서 소수가 적의 병력을 분산시켜 그 지역 한정으로 압도적인 다수의 우세를 만들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글칸 도니휴의 전쟁론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무튼 황금노래단 본대의 대부분이 이곳에 있었고 그들의 집중사격을 받은 참호와 그 부근의 칼날서약단원들은 빠른 시간 안에 전멸하였다. 그리고 컴패니언은 모두 잃었지만, 투입한 인원에 비하면 사상자는 많지 않은 동료 단원들을 구해내었다.
다른 단원들이 끌고 온 예비 컴패니언을 그들에게 주었다. 투입한 단원의 두 배 정도 되는 칼날서약단원을 사살했다. 사살한 인원의 절반에 해당하는 컴패니언과 약간의 아군 사상자가 생겼지만, 서전의 전과로는 충분하다.
30 명 정도 적다고 생각하던 양측의 병력 차이도 이쪽이 미세하지만 오히려 우세로 바뀐 셈이다.
이제 남은 것은 프엥크 부단장이 기대대로 그 뛰어난 실력으로 이끌고 있는 병력을 데리고 탈출하는 일이다. 가능한 피해를 입지 않고, 그 과정에서 적에게 타격을 주면 좋지만, 주된 목적은 탈출이었다. 본대를 유인해내는 일에는 성공했고, 탈출만 한다면 오늘의 전과는 충분하다.
그래서 가장 믿을 수 있는 부단장을 내보냈는데 실패한다면 큰일이다. 만약 부단장 프엥크가 그에라의 손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워시스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였다.
이대로 진격하여 부단장도 도울 겸 그에라의 본대와 회전을 벌이는 방법과 옆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바로 공격할 수 있는 소수의 수비병만 남은 성채를 공격하는 방법이었다.
성채를 지키고 있는 칼날서약단원은 참호의 동료들을 지원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최선은 자신들의 힘으로 성채를 지키는 일이었다. 성채를 공격하여 본대의 출발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던 2차 공격 단원들도 성채를 벗어나 참호의 본대에 합류하였다.
프엥크를 추격하던 그에라의 본대 역시 후방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차렸다. 전장에서 지휘관의 능력은 옳은 판단을 빠른 시간 안에 내리는 것이다. 둘 다 중요하지만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옳은 판단 보다 빠른 판단이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대로 돌아가 전면적인 대결을 한다면 승부는 반반의 확률이다. 성채는 소수의 인원이 지키고 있지만, 함락될 리는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닌 상대의 부단장 프엥크가 포함된 별동대를 잡거나 전멸시키는 것이 이 상황에서의 최선이라고 빠르게 판단한 그에라는 본대 병력을 돌리지 않고, 나누어서 일부를 참호나 성채 방향으로 돌려보내지도 않고 그대로 추격을 지속시켰다.
워시스 크리크가 그에라에게 넘긴 판단의 공은 이제 그에라의 그러한 결정으로 다시 황금노래용병단 부단장 프엥크에게 넘어왔다.
본래 계획에 따르면 이 시점에서 프엥크과 부하들은 탈출해야 했다. 전원이 한 방향으로 움직일지 몇 조로 나눌지 완전히 각개로 흩어져 돌파할지 정도만 상황에 따라 프엥크가 결정해야 했다.
다음 순간 참호를 확보하고 부대를 정돈하면서 전방의 상황을 주시하던 워시스 크리크의 입에서 욕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미 벌어진 일은 무를 수가 없다. 더구나 전장에서 돌발 변수는 아무 때나 예고 없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이럴 때는 그저 빠른 대처만이 유일한 길이다. 다행히 부하들은 단장의 욕을 들은 순간 사태를 직감하고 컴패니언에 탑승하고 있었다. 아직 탑승하지 않은 부하들이 있었지만 워시스는 그것을 무시하고 전원에게 진격 명령을 내렸다.
워시스가 달리면서 이를 갈면서 말을 내뱉는 복합적인 행동을 하였다.
“프엥크 이 자식 살아오지 못하면 용서 않겠다. 살아 돌아와도 그냥 두나 봐라.”
그에라 역시 프엥크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뭐야 소문과 달리 도박을 좋아하는 부단장이지 않은가 말이다. 단신으로라도 영주 경비병을 뚫고 먼 거리에서 영주 다리에다 총질 한 방만 할 수 있다면, 도착 첫날 황금노래단이 칼날서약단을 하루 만에 이겼다는 평판을 들을 수 있다는 건가?”
애초에 그것은 무리라고, 프엥크가 이끄는 황금노래단의 1차 공격조가 영지병을 뚫느라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칼날서약단원들이 배후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양측의 단장과 간부들이 모두 예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프엥크는 그에라의 본대 추격대와의 거리가 예상보다 조금 더 멀다고 보고, 부하들이 경비병을 붙잡고 시간을 끌어주면 자기 혼자서는 영주 집무실까지 내달릴 수 있다고, 그렇게 체스처럼 수장만 잡으면, 영주의 얼굴에 총구만 들이대면, 정 안 되면 영주가 보이는 곳까지만 가서 조준사격으로 다리에다 총알 하나만 박아주면, 그러면 이길 수 있다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는 그런 판단을 하고 말았다.
미리 파악해둔 정보와 이번 전투에서 드러난 병력을 생각하면 그에라가 별도로 병력을 빼내 영주 경비병들과 함께 배치하지 않았다고 봐야 했다. 영지민을 참호 공사에 동원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에 추가로 더 참호나 함정을 팠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았다. 그런 프엥크의 판단과 희망은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라도 전문가인 용병단보다 훨씬 전투력이 떨어지는 지방 영지병들만 믿고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 문제였다. 프엥크는 영지병들이 나름대로 숨어있다가 여기저기서 튀어 나온다든가 정문으로 이어지는 곳에 방책을 설치해 직선으로 달리지 못하게 준비해두어 자신들의 원거리 사격에도 대비해둔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지병들이 느닷없이 스필어택을 사용하자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이건 랜서들의 기술이잖아! 말도 안 돼. 상당히 숙련된 랜서들이나 펼칠 수 있는 것을..’
라는 외침은 마음속에서만 울렸다. 프엥크는 간신히 스필어택을 피할 수 있었지만 다수의 부하들은 차례로 낙마하였다. 전문적인 랜서도 아니고 배운지도 얼마 안 되고 가르친 사람도 잘 알고 가르치진 않았으며 배우는 사람도 대단한 재능을 지니지 않았지만, 숫자가 많다는 점이 어설프게 구사하는 기술의 미약한 효과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영지병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몇 명 중의 한 명의 기술만 제대로 먹혀도 낙마는 피할 수 없었다.
컴패니언도 없이 질주만으로 이제 프엥크 일행을 거의 다 따라잡은 그에라가 그 모습을 보며 한 마디 했다.
“도피 탈출 전략으로 갔어도 어차피 전멸했겠지만, 욕심부리다가 일을 더 쉽게 만들어주는군.”
부하들이 낙마하자 프엥크는 이미 일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주변과 배후의 영지병까지 끼고서는 무차별 사격을 할 수가 없다. 자칫 사망자가 나오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라면 칼날서약단과 죽을 때까지 싸우는 일은 그냥 죽을 때까지 싸운다는 것 말고는 아무 보람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 분명했다.
프엥크는 빠른 결단을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최단거리로 최대한 신속하게 영지를 이탈한다!”
낙마하여 영지병들과 싸우고 있던 부하들은 그 말을 알아들었지만, 금방 따를 수는 없었다.
누군가가 이의를 제기했다.
“부단장님 그렇게 하면…”
프엥크가 소리를 질러서 그 말을 막았다.
“마스터 그에라의 본대가 곧 온다. 그나마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 달려라.”
몇몇은 운 좋게 컴패니언에 다시 올라타고 몇몇은 그냥 두 발로 달렸다. 영지병들은 황금노래단원이 달아나기로 작정하자 그것을 막을 수 없었다. 수가 더 많지 않았으면 이미 밀렸을 상황이라 적이 빠져주니 그냥 한숨 돌리고 쉬는 편을 택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프엥크와 부하들이 도망치자 그에라는 그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에라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뭐야, 전장이탈인가?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해야 하나.”
그에라는 일부 부하들만 그대로 달려가게 하고 나머지는 정지시켰다. 물론 계속 달려가는 부하들의 숫자와 그 지휘자 사관의 능력이면 다른 변수는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대는 예상대로 충족되었다.
부단장 프엥크와 그 부하들은 영지 경계를 넘어 도망쳤다. 영주들과 용병단 간의 협정에 따라 이것은 전장이탈이었고, 따라서 프엥크와 그 부하들은 종전까지는 다시는 분쟁 관련 영지 세 곳 가운데 어느 곳에도 들어올 수 없었다. 전력상으로만 따지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실제로도 프엥크와 그 부하들이 모두 탈출에 성공하지는 못해서 프엥크를 따라 영지 경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부하는 여섯 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 날의 전과는 사상자 수의 비교에 있어서는 황금노래단의 우위였지만, 작전과 전투의 핵심 전력인 부단장을 종전까지 활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황금노래단으로서는 뼈 아픈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추가 기록: 현 국왕이신 타히엘 폐하의 승인을 얻어 이 문서에 아래의 기록을 덧붙인다.
첫 전투가 그렇게 진행된 하루 뒤 돈을 받고 편지를 가져온 사람으로부터 프엥크의 편지를 받은 마스터 워시스 크리크는 새로운 지령을 쓴 후 그 명령서를 프엥크에게 전달하도록 부탁했다. 어차피 부단장은 전투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으니 추가 병력을 모집하라는 내용이었다. 빠른 시일에 모집할 수 있다면 추가 병력은 새로 이 전투에 참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전투 후의 모병은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프엥크가 어떤 경로로 어떻게 왕국 수도 투기장의 프리엄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후 수상한 계약을 속아서 맺게 되었는지는 또 다른 이야기이나, 바로 그러한 과정 가운데 야기되어 이후 드러나게 된 일련의 투기장 관련 사건이 이 전투와 관련 있음을 밝혀두기 위해 이 기록 문서에도 덧붙이는 바이다. 아무튼 서전부터 딱히 누가 우세하다고 할 수 없었던 전투는 그 후 몇 차례의 전투가 계속 이어지면서도 그러한 피장파장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이후 이 전투에 라민 장군이 개입하여 종전을 이끌어냈으나, 이미 적은 바와 같이 이 과정이 외부에 공개할 수 없는 법적인 문제를 일으킬 것을 염려하여 이후의 모든 전투와 기타 사항이 모두 기밀문서로 분류되었다.
그러므로 이를 열람할 권한을 지닌 관리는 해당 기밀문서는 물론 <투기장 폐쇄애 관한 칙령 제62조> 문서와 관련된 수사기록 역시 필히 열람하기를 권하기 위해 이 같은 첨언을 부기하여 두는 바이다.
타히엘 재위 11년 3월 왕국 수석 기록관 에센 요나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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